[역경의 열매] 오성삼 (6) 궁핍한 대학생활… ROTC 임관 ‘늑막염’으로 좌절
입력 2013-02-21 17:03
대학교 2학년이던 1967년 7월,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더위를 피해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바캉스를 즐기던 그 여름, 나는 대학신문사 편집장이던 농화학과의 황형, 대학방송국장이던 축산대학의 윤군과 공과대학 건물에 있던 학교 방송실에서 생활했다. 그때 우리는 잠자리로 건물 옥상을 주로 이용했다.
우리는 식량이 떨어져갈 즈음이면 주머니를 털어냈고 그래도 여의치 않을 때면 닥치는 대로 일해 끼니를 장만했다. 쌀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공사판에서도 일했다. 며칠째 비가 내려 공사판 일은 중단되고 어디서 식량을 구해야 할지 막막하던 어느 날이었다. 황형과 윤군은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갔고 결국 건물엔 나 혼자만 남았다. 끼니를 굶어본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그때처럼 몸을 추스르기조차 힘겨운 적은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쌀자루를 탈탈 털어보니 겨우 한 줌 정도 모아졌다. 냄비에 담아 벌겋게 달아오른 전열기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냄비가 나뒹굴고 쌀은 시멘트 바닥에 쏟아졌다. 젖은 손으로 전열기에 냄비를 올려놓다가 감전이 되는 바람에 냄비를 엎은 것이다. 한동안 흩어진 쌀알들을 망연자실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흩어진 쌀을 한 알 한 알 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울컥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이 감정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치 어린시절 고향 하늘의 별을 세듯 쌀알을 세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낡거나 흐려지지 않는 나의 기억이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3학년이 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ROTC 후보생(8기)이 되었다. 대학 생활과 군사 훈련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1, 2학년 때처럼 아르바이트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500명당 한 명꼴로 대학에 배정된 5·16장학금(현재의 정수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이제 대학 건물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학교 주변에 월세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까칠한 수위에 대한 복수의 길이 점차 넓어지는 것 같았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라. 지금 이대로라면 내가 교수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내 인생의 빗줄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9년 12월 22일 오후. 수도육군병원에서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ROTC 임관 신체검사에서 늑막염이 발견되어 임관 불가 판정이 났다는 통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2년 전 ROTC 입단 신체검사 때 지원자들 가운데 최초로 완(完)자 판정을 받은 나였다. 꿈같아서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현실이었다. 쪼들리는 시간을 쪼개고 힘겨운 생활을 연장해가면서 지난 2년 동안 여름방학이면 병영훈련을 받고, 학교에서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총을 들고 훈련에 임하던 그 수고와 노력이 날아가고 만 것이다. 함께 훈련 받았던 ROTC 후보생 가운데 낙오자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영양실조에 과로까지 겹친 결과였다.
그토록 절망적이던 순간 본능적으로 지금껏 나를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찾았다. 내 인생 행로에 직진의 파란 신호등 대신 잠시 기다리라는 노란 신호등을 켜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 언젠가 목적지에 이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아픔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의 여정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늑막염이 불치병에 걸려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넷이란 젊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