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동훈] 주목받는 옛 소련 해체론
입력 2013-02-20 22:29
1991년 봄학기였을 것이다. 사회학과 교수께서 강의를 하다 말고 갑자기 소련 해체 소식을 얘기하며 “힘이 주욱 빠져 나간다”고 말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정책 ‘페레스트로이카’가 꽃을 피우기도 전 동서냉전의 한 축이 무너진 데 허탈감을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대학가에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구 위성국가들의 탈(脫)소련 러시가 어떤 방향으로 치달을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터여서 운동권·비운동권 할 것 없이 놀라움에 빠졌다.
이런 소련 해체의 기억이 22년이나 흐른 지금 되살아났다. 한국과 중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한결같이 소련의 몰락을 얘기하고 나선 것이다.
한·중 지도자들 잇단 언급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지난해 12월 광둥성 순시 때 고르바초프의 실패 원인을 언급했다. 가오유라는 전직 기자가 최근 블로그에 올린 시진핑 발언록에 따르면 그는 공산당 관료들과의 비밀회동에서 “중국은 깊고도 심오한 옛소련의 교훈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론했다. 그는 소련 해체 원인과 소련 공산당의 붕괴 원인을 묻고는 공산당의 이상과 신념이 흔들렸기 때문이라고 자문자답했다.
개혁을 강조하기 위해 ‘신남순강화’에 나선 시진핑으로선 공산당 관료들의 부패척결 없이는 체제유지도 어렵다는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뉴욕타임스는 군부와 좌파의 개혁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차원이라고 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지만, 전자의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소련해체 원인을 두고 여러 주장이 있지만 브레즈네프 때부터 수십년 쌓인 관료 부패와 경제실정 등 제반 문제가 곪아 터졌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중국이 분열된다면? 러시아가 15개 국가로 쪼개졌지만 아직도 소련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과 달리 중국은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이 국토의 64%나 차지하는 상황이니 만큼 시진핑으로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3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소련의 해체를 언급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는 대통령직인수위 외교국방통일분과 토론회에서 “북한이 아무리 많은 핵실험으로 핵 능력을 높여도 국제사회에서 외톨이 국가가 되고 국민들을 궁핍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국력을 소모하면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자초하는 것”이라며 “구소련이 핵무기가 없어서 무너진 게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틀 뒤 이명박 대통령 역시 국민원로회의에서 “소련의 스탈린 정권이 30여 년 유지됐는데 북한은 벌써 60년째”라며 정권교체 가능성을 언급했다.
한반도 최악상황 비화 안되길
한국 지도자들의 소련 해체론 언급은 공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시진핑의 공산당 내부 비밀발언과는 무게감이 달리 느껴진다. 공교롭게도 이들 발언에 즈음해 남한 핵무장론이 비등해지는 등 우려스런 국면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소련 붕괴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소련 해체 공작, 즉 군비 경쟁을 통해 소련을 경제난으로 몰아넣은 것이 결정타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며 핵무장론을 부추기기도 한다. 재무장을 호언하고 있는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대북 선제공격론까지 서슴없이 꺼내들고 있다.
1차 북핵위기가 고조되던 1994년 3월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빌 클린턴 행정부는 전쟁준비에 들어가는 등 한반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소련해체론에 대한 맞대응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북한은 엊그제 제네바에서 한국을 “최종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감정적인 말싸움이 19년 전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이동훈 국제부장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