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손’ 호미곶 둘레길서 맞잡아볼까… 포항 ‘호미기맥감사둘레길’ 첫선

입력 2013-02-20 17:30


청보리야 감사하다. 호미곶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파릇파릇 자라줘서…. 도음산아 감사하다. 4년 전 산불피해를 극복하고 새싹을 틔워줘서…. 감사할 일이 어디 이뿐이랴. 호미곶 청보리밭 터줏대감인 소나무는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꼿꼿해 감사하다. ‘상생의 손’ 사이로 매일 떠오르는 태양도 감사하고, 항해하는 선박을 위해 밤바다 불을 밝히는 호미곶등대도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도시’ 경북 포항에서는 범사(凡事)가 감사(感謝)하다. 구룡포에서 호미곶을 거쳐 북부해수욕장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최근 조성된 ‘감사둘레길’을 쉬엄쉬엄 걷다보면 감사라는 단어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감사의 대상은 자연뿐만이 아니다. 큰 탈 없이 자라주는 자녀도 감사하고, 늙으신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도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포항시 전역에 조성된 21개의 감사둘레길 중 풍경이 수려한 곳은 해파랑길과 인접한 5㎞ 길이의 호미기맥감사둘레길. 출발점은 도음산 아래에 위치한 구만리의 팔각정이다. 야트막한 야산인 도음산은 2009년 큰 산불로 황폐화됐으나 주민들이 나무를 심고 바람에 날아온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서서히 되살아나 있다.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에 새삼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그때의 상처로 인해 아직은 푸석푸석한 등산로를 20여 분 올라 정상에 서면 구만리와 대보리의 드넓은 청보리밭과 우뚝 솟은 풍력발전기, 그리고 호미곶등대와 푸른 동해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해맞이 명소인 호미곶(虎尾串)은 동해안 해안선이 남으로 내달리다 호랑이 꼬리처럼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본래 장기반도에 위치해 장기곶으로 불렸으나 2000년 새천년 밀레니엄 행사를 앞두고 호미곶과 호미반도로 지명이 바뀌었다.

10만여 평의 보리밭이 초록융단처럼 펼쳐지는 구만리(九萬里)는 도음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 구릉으로 아주 멀고 까마득한 곳이라 ‘구만(九萬)’으로 불렀다고 한다. 구만리라는 지명은 1453년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한 영의정 황보인의 노비가 한양에서 구만리나 떨어진 호미곶으로 피신한 데서 유래했다.

황보인의 가족이 몰살되기 직전 단량이라는 이름의 노비는 황보인의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호미곶까지 피신해 살다가 구룡포읍 성동마을로 이주한다. 그리고 숨지기 전 자식처럼 키운 황보인의 손자에게 자신은 친모가 아니라 노비라고 고백한다. 이에 후손들은 가문을 잇게 해준 노비를 기리기 위해 구룡포 광남서원에 단량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 자손 대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바닷바람이 강해 쌀농사가 힘든 이곳에서는 ‘구만리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세 말을 못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릿고개 넘기가 무척 힘든 깡촌이었다. 어렵던 시절 춘궁기가 되면 구만리 처녀들은 보리밭 밭두렁에서 쑥을 캐 허기를 달랬다. 하지만 구만리 처녀들은 강한 생활력으로 시집가면 억척스럽게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쌀 세 말 못 먹여 시집보낸 부모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호미곶을 대표하는 풍경은 호미면사무소 앞의 보리밭에 뿌리를 내린 여섯 그루의 소나무. 본래 다섯 그루였으나 10여 년 전 태풍에 가지가 꺾인 한 그루가 고사한 후 두 그루를 새로 심었다. 그 중 세 그루는 수령이 100년 가까이 되는 고목. 이른 아침 황금색 햇살이 보리밭과 소나무 가지를 황금색으로 적시고, 햇살을 뒤쫓아 온 바닷바람이 보리밭에서 물결치는 오월의 맥랑은 황홀의 극치라고나 할까.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호미곶은 동지(冬至) 전후를 제외하고는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호미곶이 한반도의 동쪽 끝임을 확인한 사람은 고산자 김정호. 그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한 후 한반도의 최동단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호미곶에서도 한반도 동쪽 땅끝은 구룡포읍 석병리의 갯바위. 천혜의 낚시터로 유명한 이곳에는 한반도 동쪽 땅끝을 표시하는 원형의 돌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호미곶 해돋이는 1999년 설치된 ‘상생의 손’으로 인해 더욱 감동적이다. 동서화합과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바다에는 오른손, 육지인 해맞이광장에는 왼손을 설치했다. 황동으로 만든 두 손의 거리는 180m. 오른손 높이는 8.5m, 왼손 높이는 5.5m이지만 두 손의 크기는 시각적으로 비슷하게 보인다.

호미곶 해돋이는 밤새 불을 밝히던 호미곶등대가 휴식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수평선에서 밤새 어화와 함께 오징어를 낚던 어선들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구룡포항으로 돌아오면 여명의 바다로 마중 나갔던 갈매기들도 덩달아 너울너울 춤을 춘다. 화답이라도 하듯 수평선 아래에서 부챗살 모양의 빛줄기가 솟아올라 암청색 구름을 화염처럼 붉게 채색하면 갈매기들이 ‘상생의 손’ 다섯 손가락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호미곶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능선을 따라 3㎞ 정도를 걷던 호미기맥감사둘레길은 도음산을 하산하자마자 숲 속에서 대보저수지를 만난다. 대보저수지는 호미곶 사람들의 상수원이자 구만리 보리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감사의 젖줄. 청둥오리 가족이 거울 같은 수면에서 자맥질을 할 때마다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는 대보저수지 길을 2㎞ 정도 터벅터벅 걷다보면 다시 청보리밭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호미곶 구릉에 서게 된다.

포항=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