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윤리학’ 조진웅 “찌질하고 비열한 사채업자, 하지만 가장 현실적이지 않나요?”
입력 2013-02-20 22:31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을 보필하는 충직한 호위무사,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자신의 이권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조직폭력배. 배우 조진웅(37)의 연기는 선 굵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 캐릭터다. 그런 그가 뜻밖의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21일 개봉하는 영화 ‘분노의 윤리학’(감독 박명랑)에서 야비하면서도 코믹한 배역을 맡았다.
18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조진웅은 “관객들이 조금은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역할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영화를 식당 메뉴에 비유했다. “식당에 가면 고급 재료로 만든 값비싼 음식이 많잖아요. 그런데 대표적인 메뉴만 드시면 편식이에요. 이것저것 골고루 먹어야 건강에 좋은 거죠. 영화 관람도 마찬가지예요.”
그의 말대로 ‘분노의 윤리학’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독특한 맛을 선사한다. 미모의 여대생이 살해된 뒤 그녀 주변의 네 남자가 벌이는 기묘한 이야기를 그렸다. 여자의 집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경찰(이제훈), 여자와 불륜관계인 대학 교수(곽도원), 여자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는 옛 애인(김태훈), 여자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사채업자(조진웅).
네 남자가 서로를 괴롭히며 한꺼번에 부딪히는 상황은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다. 여자를 죽인 범인은 영화 초반에 드러나는데 남자들은 책임을 전가하며 각기 분노한다. 악랄한 사채업자 역을 맡은 조진웅은 여자의 삼촌을 자처하며 큰소리 탕탕 치다 여자가 죽은 후 위기에 몰리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고서 감독에게 물었다. “남자들을 다 왜 이렇게 만들어요? 찌질하고 비열하게. 굳이 꼭 이렇게 해야 돼요?” 돌아온 감독의 대답.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요?” 조진웅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자기가 불리해질 때 비굴해지고, 약자를 더 가혹하게 대하는 게. 내가 연기한 사채업자도 분명히 현실에서 존재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극 중에서 그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 가운데 분노가 가장 강하다고 설파한다. “화를 낼 때는 무언가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을 때잖아요. 저는 이성적으로 차분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집에 와서는 베개를 뒤집어쓰고 울기도 해요. 참았던 게 억울한 거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젠 영리하게 살아야지’하고 생각하게 돼요.”
네 남자가 치명상을 입은 채 대치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른 여인(문소리)까지 가세한 배우들의 연기가 빛난다. 특히 조진웅의 연기가 압권이다. 비겁하면서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웃음 짓게 한다. 그는 “3일 정도 촬영한 후 재미없다는 의견들이 나와 똑같은 장면과 대사를 5일 동안 반복했다”며 “나는 처절하고 절박한 심정인데 보는 사람은 웃음이 나온다니 성공한 셈”이라고 했다.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끼를 뽐내면서 화제가 됐지만, 그는 스스로를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일상생활에서는 말도 별로 없고 평범해요. 영화 작업을 하면서 재미있어지죠. 제가 연기한 인물 중에서 닮고 싶은 캐릭터를 꼽으라면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무휼이나 ‘사랑을 믿어요’의 국밥집 사장님 같은 사람이에요.”
김윤석과 호흡을 맞추는 ‘화이’, 류승룡과 함께하는 ‘명량-회오리바다’를 촬영 중인 그는 “꼭 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느냐”는 질문에 “덩치도 큰 내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를 할 순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좀 더 다양하고 이색적인 캐릭터에 도전하려 한다”고 답했다. ‘분노의 윤리학’도 그런 각오로 임했으니 관객들이 한 번쯤 색다른 맛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