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2월 21일] 항상 기뻐하는 이유

입력 2013-02-20 17:16


찬송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304장(통404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 :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절인 28장 20절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고린도지역에서 전도할 때 유태인들이 구타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신실한 종인 바울과 실라일지라도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내가 이렇게 맞아가면서까지 이곳에서 이 일을 해야 하나?’ 그날 밤 환상 중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바울 사도를 위로한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라는 말씀입니다.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외친 절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입니다. 연합군이 수용소를 탈환하고 건물을 조사하다가 벽에서 찬송가 가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하늘 두루마리 위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있을까. 바다 먹물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있을까.”(찬304장)

하나님의 사랑? 이 저주스러운 수용소에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니 웬 말입니까? 너무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고백 앞에 조그맣게 쓰인 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주었는지, 어떤 힘을 주었는지, 어떤 소망을 주었는지, 어떤 기쁨을 주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그 믿음 때문에 저주스러운 수용소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기쁨의 장소로 바뀌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역설을, 이 깊이를, 이 세계를, 가슴으로 체험하지 않고 어떻게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겠어요?

어느 무명 시인의 ‘두 발자국(Foot Print)’이란 시를 아시나요? 그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나는 꿈을 꾸었네. 해변에는 주님과 내가 함께 걸은 네 개의 발자국이 새겨 있네. 어디쯤엔가. 두 개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두 개의 발자국만 남았네. 나는 주님께 물었네. ‘주님 그때가 나의 인생 중에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주님은 왜 나를 버리시고 떠나셨습니까?’ 주님은 대답했네. ‘그때 네가 너무 지쳐 있기에 내가 너를 안고 걸었노라.”

우리도 불신자들과 똑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신자와 다른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기도 :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진홍 목사(우이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