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5) 대입시험문제지 복사해 팔며 ‘교수의 꿈’ 키워
입력 2013-02-20 17:16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다가왔다. 취업을 한다 해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머지않아 군대에 가야 하는 문제도 있었기에 취업보다는 대학 진학이 장기적 관점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새벽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일어나 기도하는 소리 때문에 고등학생이 되면서 차츰 철이 들었고 공부도 하느라 해서 졸업식 때 우등상을 받았지만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다.
건국대학교 농업교육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농업고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학과니 인기도 별로 없을 것 같고 그해 처음 생긴 학과여서 미달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더구나 농고에 다닌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원서 접수 마감 결과 경쟁률이 1.3대 1이었다. 낮은 경쟁률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떨어져야 할 상황이었다. 떨어질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까지 다녀온다는 것이 무모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날 새벽 떨어질(?)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기차를 탄 것은 내 인생에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시험장에 도착해 1교시 시험이 시작되면서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다. 결시생들이 발생해 경쟁률이 0.8대 1로 미달된 것이다. 합격이 보장된 행복한 시험이었다. 살아가면서 간혹 이런 상상도 해본다. ‘내가 만일 떨어질 것이 두려워 그날 아침 시험장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 날 새벽, 망설임 끝에 선택한 순간의 결정이 내 인생 행로를 극적으로 바꿔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봄철 꽃봉오리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랑의 빵’ 모금으로 잘 알려진 한국월드비전에서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주었기에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매일 새벽 6시 30분, 하루 한 번뿐인 서울행 아침 열차를 타고 왕십리역에서 내려 건국대학교까지 걸어갔다. 같은 과 친구들은 매일 아침 일찍 등교하는 나를 매우 부지런한 모범생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를 과대표로 뽑아주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사연을 학과장 교수가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군 고생스럽게 통학하지 말고 내 연구실에서 지내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대학건물에서 학창생활을 시작했다. 통학시간을 공부하는데 투자할 수 있었다.
대학 1년 과정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고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짐 꾸러미에서 지난해 치른 입학시험문제지를 발견했다. 전년에 출제된 문제를 과목별로 다시 적어 등사기로 밀었다. 원서를 접수하러 오는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대학교문 앞에 좌판을 벌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저녁이면 양쪽 바지 주머니 속에 지폐가 가득했다.
시험지 장사는 다음 겨울방학에도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새 경쟁자가 생겨났다. 나보다 싼값으로 시험문제지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정문을 지키던 수위들이 교문 앞 잡상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까칠하게 굴던 수위아저씨가 그날따라 언짢은 일이 있었는지 단속하면서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수위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뒤척이며 생각해낸 것이 대학 교수가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이 대학의 교수가 된다면 오늘 나를 조롱하던 그 수위는 내가 교문을 지나칠 때마다 거수경례를 하겠지. 그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당당하게 교문을 지나는 나는 얼마나 쾌감을 느낄까.’ 이런 생각이 유치하게 보이지만 약자가 되면 유치하리만큼 사소한 것들에 인생을 걸기도 한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