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라덴 추적 작전 다룬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진실은
입력 2013-02-19 22:35
제작사 “영화 속 모든 장면은 사실”
CIA “드라마일뿐… 많이 다르다”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오사마 빈 라덴 추적 작전을 영화화해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ZD30)’가 한국에서도 곧 개봉된다.
이 영화는 이런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이 영화는 실제 일어난 일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에 기초해서 만들었다.” 즉 작전에 실제 참여한 CIA와 미 해군 요원들이 영화 제작진에게 관련 정보를 공개했다는 의미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기자들에게 뿌려진 보도자료 제목도 이런 식이다. ‘9/11 그 이후, 10년간의 추적실화가 고스란히 펼쳐진다.’ ‘영화 속 모든 장면이 사실이다!-미국 국방부장관 인정, 논란 확산!!’ 영화사는 느낌표를 두 개씩 붙여서 강조했지만, 미국에서 ZD30가 공개됐을 때 CIA의 마이클 모렐 국장대행은 이례적으로 직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비판했다. “이 영화는 드라마일 뿐이며 사실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 아니다.”
ZD30는 그믐밤 0시 30분, 빈 라덴 체포 작전 시각을 뜻한다.
◇개봉 전부터 논란
개봉 시점부터 문제였다. 애초 미국의 대통령 선거 직전인 지난해 10월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공화당의 거센 반대로 미뤄졌다.
당시 CIA국장인 리언 패네타는 “정치적으로 관련된 이 영화 제작자에게 빈 라덴 사살과 관련된 비밀 정보에 특별히 접근하도록 전적인 지원을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영화 내용이 철저히 버락 오바마 정부의 시각에서 작성된 정보에 기초해 미국에 유리한 것만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수백 건의 기밀문서가 할리우드에 전해진 점도 논란이 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빈 라덴의 은신처는 CIA문서에 그려진 도면과 똑같다.
결국 ZD30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됐다. 이번엔 민주당이 발끈했다. 영화 속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딱 한 장면 등장하는데, TV에 나와 “우리 정부는 미국의 도덕적 위상을 되찾기 위해 고문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직접 알카에다 관련자를 고문했던 CIA 요원들은 이 장면을 시청하면서 서로의 눈치를 볼 뿐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오바마 정권에서도 고문이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다.
◇알카에다는 고문 받아도 되나
가장 크게 논란이 된 것은 영화가 CIA의 고문 사실을 잔혹하게 묘사하면서도 이를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 ZD30는 CIA가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알카에다 고위 인사를 체포해 고문했고, 그 과정에서 빈 라덴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인 정보를 확보했다고 서술한다.
CIA 조사관으로 빈 라덴 추적 작전에 참여했던 알리 사우펀은 포린폴리시와의 인터뷰에서 “영화가 사실과 다르다”며 “빈 라덴 체포에 쓰인 정보는 고문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아랍권의 뉴스채널 알자지라TV는 “ZD30가 고문을 특별히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 고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가정해 이를 둘러싼 도덕적이고 법적인 문제를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미 상원의 민주당 다이앤 파인슈타인, 칼 레빈, 공화당의 존 매케인 의원은 영화 배급사인 소니픽쳐스에 항의 서한을 보내 영화 내용을 고쳐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주인공은 실제 인물?
주인공인 CIA 여자 요원 마야의 실체도 모호하다. 영화에서는 이 여자 요원이 거의 홀로 빈 라덴 은신처를 알아내고는 백악관을 포함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전을 감행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실제 30대 중반의 여성 요원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작전에 참여했다”며 “그 공로로 이 여성 요원은 2012년 동료들과 함께 최고훈장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WP는 그러나 이 요원이 훈장을 받은 직후 다른 이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방해하려 했고 나에게 맞섰다.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나뿐”이라고 비난하는 이메일을 보냈고, 그 뒤 승진 심사에서 탈락했다고 전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다룬 미국 TV 드라마 ‘홈랜드’에도 CIA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여성 요원이 등장하는데, 역시 같은 인물이 모델이 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CIA에서 팀장을 지낸 나다 바코스는 퍼시픽스탠다드에 보낸 기고문에서 “마야의 캐릭터는 지나 베넷, 제니퍼 매튜, 바버라 수드 3명의 실존 여성 CIA 요원을 뒤섞은 인물로 보인다”고 밝혔다. 베넷은 1993년부터 알카에다를 쫓아온 인물이고, 매튜는 추적 과정에서 사망한 요원이다. 실제 작전에 참여한 마크 오원이 쓴 책 ‘쉽지 않은 날(No Easy Day)’에 등장하는 ‘젠’이라는 이름의 여성 요원이 모델이 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모렐 CIA국장대행은 “10년에 걸친 빈 라덴 추적은 수백명의 요원들이 헌신한 결과”라고 반박했다. CIA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언론인 피터 버겐은 미국공영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빈 라덴 은신처를 처음 밝혀낸 요원은 남성”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의 반성문인가?
미국에선 ZD30와 유사한 영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같은 빈 라덴 추적 작전을 소재로 한 ‘코드네임 제로니모’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됐다.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은 영화 ‘그린존’은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실체가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ZD30를 만든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이라크의 미군 병사를 주인공으로 한 ‘허트로커’로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각본상을 받았다.
이런 작품들은 21세기 초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을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쟁과 폭력을 동원한 테러 방지 대책이 무모했다는 반성이 미국 내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기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ZD30는 개봉 첫 주 흥행 1위를 차지했다.
ZD30에서는 군인들이 빈 라덴을 사살한 뒤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치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비춰진다. 여주인공을 태운 공군수송기가 이륙하기 위해 문을 닫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테러의 시대를 이제 마무리 짓고 싶은 미국인의 마음이 그 장면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