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극장 국가’

입력 2013-02-19 17:52

한반도 남쪽에서는 삐라처럼 나붙는 새 정부 인사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북쪽에서는 3차 핵실험 이후 잔치로 분주하다. 군중집회에 참석한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핵 보유국’을 자축했다. 김정은 등 지도부는 근엄한 모습으로 김일성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에 들러 공화국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했다. 인민들은 이 모습을 보며 또 한번 전율하며 열광한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김일성과 김정숙의 항일투쟁을 편집해 건국신화를 만들고,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 대규모 공연인 ‘아리랑 대축전’으로 체제를 선전하는 혁명예술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주체사상탑과 같은 대규모 조형물도 동원됐다. 욕을 먹든 말든 그들은 3대에 걸친 가족국가를 만들었고 지금 하늘로, 바다로 미사일을 쏘고 있다.

지구촌의 이 기이한 국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그나마 인류문화학에서 말하는 ‘극장국가론’이다. 의례와 공연 같은 과시의 정치로 집단을 통치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발리 왕국을 연구한 결과 왕의 장례와 같은 의식 자체가 정치행위로 작동되는 사실을 밝혀낸 뒤 하나의 이론으로 인정받았다.

권헌익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정병호 한양대 교수가 쓴 ‘극장국가 북한’은 기어츠의 이론을 북한 체제에 적용한 결과물이다. ‘피바다’ ‘꽃 파는 처녀’ ‘아리랑 대축전’으로 이어지는 과시적 스펙터클이 통치의 뛰어난 기제로 작용했다며 극장국가의 흔적을 찾고 있다. 북한이 동구권의 길을 걷지 않은 것은 유교와 스탈린주의를 결합한 가족국가의 장치가 작동되기 때문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TV, 영화, 공연 등 예술이라는 것이다. 2011년 12월 29일, 눈발 흩날리는 평양에서 치러진 김정일 장례식이나, 최근에 치러진 캄보디아 국왕 장례식 역시 의례를 통한 권위의 재생산 과정일 것이다.

궁금한 것은 극장국가의 수명이다. 저자들은 “인민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국가란 존립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21세기에 미라 보존이나 군사 퍼레이드로 정치권력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극장국가를 접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빗나간 북한연구가 얼마나 많은가. 문화인류학 역시 북한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각 가운데 일부만 다루다 보니 설명력의 한계를 보인다. 북한은 학자들을 골탕 먹이는 나라이기도 하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