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지형은] 불안 그리고 희망의 상상력

입력 2013-02-19 18:19


주후 300년경 옥시린코스란 작은 도시, 지금의 이집트 땅이고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 지역이었다. 한 남자가 신의 뜻을 물으려고 종이에 질문을 적어왔다. “내가 보조금을 받게 될까요, 내가 선한 일을 하게 될까요, 내가 돈을 받게 될까요, 내가 팔리게 될까요, 내가 걸인이 될까요, 내가 도망가야만 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도망이 끝이 있을까요, 내가 시의원이 될까요, 내가 아내와 이혼하게 될까요, 내가 독살을 당할까요,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게 될까요?”(미셸 끌레브노,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갈대 속껍질로 만든 당시의 종이 파피루스에 쓰인 질문이 잡다하다. 분명한 것은 불안으로 가득한 섬뜩한 분위기다. 이 남자가 잔뜩 지고 있는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삶의 문제였을까, 주후 3세기에서 4세기로 넘어가는 로마제국의 사회문제였을까.

호흡 길게 하고 큰 그림 그려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여 우선 드러나는 것은 사회·경제적인 불안이고 여기에 정치·군사적인 불안정이 연결돼 있다. 그 즈음 로마제국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 세기에 걸친 전성기가 지나고 거의 한 세기 동안 로마는 계속 약해져 왔다. 국경에서 발생하는 이민족의 침입은 다반사가 되었다.

실제적으로 심각한 것은 내부적으로 경제 구조가 무너져가는 것이었다. 파산당하는 가정이 늘어갔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이 많았다. 노예가 되느니 사회에서 이탈하는 쪽을 택하여 사막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즈음 기독교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다. 대략 250년 정도에 시작되어 점점 심해지는 경제적 사회적 파산 상황에서 당시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기독교 신앙에서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안식처가 탄생한 것이다.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사회·경제적인 의미가 ‘사회적으로 파산당한 도망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였고 여기에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힘이 싹텄다.

우리 시대가 불안하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게 힘겹다. 자영업 비율이 30%가 넘는 비정상적인 취업 구조에서 요즈음은 그나마 버텨오다가 문을 닫는 자영업자가 많다. 대기업의 이익이 양질의 일자리 확장이나 노동자의 소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한편으론 고소득자가 지갑을 닫으면서 명품 매출이 줄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고품 매매 시장마저 위축될 정도로 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맨다.

경제가 이런데 국내의 정치 상황도 시계가 흐리다. 이제 곧 출범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초기 상황이 만만치 않다. 새 대통령의 스타일에 각료와 공직자는 물론이고 정치권과 기업 그리고 국가 전체가 한참이나 적응 과정을 거쳐야 할 텐데 진통이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합의와 사회적인 협조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정착되지 못하면 이명박 정부가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할 위험도 없지 않다. 국제정치와 외교적인 역학관계가 복잡하다. 북한 핵 문제에 걸린 상황은 위기인데 나라 안에서는 지나치게 태평하다. 한·중·일 3국의 이해관계와 셈법이 얽혀 있고, 미국의 입장을 우리가 간단하게 헤아리기 어렵다.

문젯거리만 잔뜩 늘어놓았다. 핵심은 이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살아야 하니까 또는 살 거니까 길은 찾아야 한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긴 호흡을 갖고 큰 그림을 그리며 풀어가는 것, 다른 하나는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것이다.

종교가 중요한 역할 해야 할 때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피난처를 만들고, 거기에서 다시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구제, 마음의 위로, 정신사적인 방향 제시 등을 포함해 사람들이 견디어내도록 정신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불안의 시대를 넘어서는 힘은 희망의 상상력이고, 인류 역사에서 종교가 이 역할을 맡아 왔다.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