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근미]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
입력 2013-02-19 18:19
3차 핵실험으로 북한이 거의 핵보유국에 근접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우리 사회는 놀랄 정도로 평온하다. 핵실험 당일에도 ‘북한 핵실험’은 세일을 시작한 모 화장품에 밀려 검색어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사자성어가 머리를 떠나지 않은 하루였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핵 문제를 화제로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며칠 전 뉴스에서 평양 시민이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끓어오르는 격정을 참을 길 없습네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서울시민은 끓어오르는 걱정을 누를 길 없다’고 썼더니 그제야 몇몇이 울분이 담긴 댓글을 달았다. 북한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고 대화로 풀자는 성인(?)도 있었지만.
북한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지인도 많지 않다. 일본 언론에 기고하느라 바쁜 후배 K나 만나야 북핵 얘기가 나오는 정도이다. 지난주 일본 시사주간지에 두 건의 기사를 송고한 K는 “일본에서 계속 후속 기사를 청탁해오고 있다. 일본은 북핵을 이슈화해서 자국의 핵개발과 자위대 활동의 정당성 논리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북핵 문제에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며칠 지나자 참고할 만한 기사가 없을 정도다”라고 했다. 중국 젊은이들까지 배신감과 분노를 표출하는 마당에 우리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와 ‘현상보다 해석에 관심 갖기’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명백한 사실이 180도 다른 사안으로 탈바꿈하는 예가 허다했고, 조작된 정보가 군중을 움직인 예도 있다. 짜증낼 때와 분노할 때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을 회피와 무시로 덮어버리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안과 감정을 폭발하는 사안의 기준도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계속 맞으면 나중에는 고통을 못 느낀다고 한다. 아픔을 못 느끼더라도 난타를 당하면 죽거나 골병이 든다는 자각은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결정타를 맞기 전에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아진 듯해서 걱정이다. 명백한 시대를 모호한 해석이 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나 자신부터 사실을 직시하고 현상을 파악하면서 진리를 따르고 있는지 점검해봐야겠다.
이근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