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도미니카 김성자 선교사] (2) 선교지에서 만난 영원한 동역자
입력 2013-02-18 17:37
하나님께서 선물 주신 짝 무슨 일 닥쳐도 든든한 버팀목 함께 주님 나라 확장합니다
2000년 5월의 어느 날 사랑하는 친구 쟈스민이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해서 여러 현지인 친구들을 사귀게 됐습니다. 쟈스민은 우리를 위해 전통음식을 만들어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식사 후엔 그녀의 언니 까르멘 사모가 기타를 치고 마띠에르 형부가 인도하는 찬양을 다 함께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며 친구가 됐고, 그곳에서 호세 보바디쟈 목사를 만났습니다. 일주일 후 그가 전화를 걸어 “나에게 한 번만 만남의 기회를 준다면 큰 축복이겠다”고 부탁을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나는 한 친구가 어머니의 날 연극행사가 있다며 자기 교회로 초대해서 참석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보바디쟈 목사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친구인 담임목사의 초대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선교에 관심이 많다면서 대화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속 무차아구아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역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혼자서 자동차도 없이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그 험한 산속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20여년 동안 방송국 아나운서와 서양화가로 활동하다가 미국에 있는 부모를 따라 미국 영주권을 받고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고국을 떠난 지 2년6개월 만에 휴가차 고향에 왔다가 우연히 나를 만나게 된 것이었지요. 당연히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나는 그를 계속 만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미국으로 떠나는 날짜를 계속 미루고 선교사역에 참여하며 내 곁에서 맴돌았습니다. 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질수록 나는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늘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그를 대했고 “제발 빠른 시일 내에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의 불같은 사랑을 받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당신이 선교사이고 목사인데 하나님께서 나쁜 사람을 동반자로 주시겠느냐”고 설득하면서 “나는 주님께 응답을 받았으니 당신도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는 나를 만난 순간부터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짝이라고 믿고 수개월 동안 결혼을 목적으로 기도를 해왔던 것입니다. 교제는 편하게 할 수 있지만 결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12월 말에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만났습니다. 나는 마음속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는 살고 있던 집과 자동차를 처분하고 집기들도 정리했습니다. 미국에서 그린 50여점의 작품을 가족에게 맡기고 2001년 1월 중순에 산토도밍고로 돌아왔습니다.
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나는 다시 부담을 안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의 뜻이라면 결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런 속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우리는 네가 외지에서 홀로 사역하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서 울면서 기도했다”면서 결혼을 적극적으로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자신이 주님께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혼자 100일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동역자로 주심을 확신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에게 결혼을 허락하는 대신 신학대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신학 공부를 통해 선교사의 마음을 알게 하고 싶었고, 귀한 선교사역을 함께 나누면서 살고 싶어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지요.
그는 어릴 때부터 순복음교회에서 담임목사님 말씀에 늘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학 공부를 안 해도 충분히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해 2월 국제복음신학대에 들어가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만난 지 1년 만인 2001년 5월 26일 자그마한 예배실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둘째언니가 한국의 가족 대표로 참석했고 동료 선교사들도 축하해주러 오셨습니다. 결혼 이후 남편의 사랑과 도움을 받으면서 선교사역은 계속 확장됐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누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과 경험 없이 오직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사역지 중 멘도사 지역 빈민촌은 도둑들이 교회까지 들이닥치고 길거리엔 마약중독자와 술주정뱅이들이 넘쳐나 참으로 사역하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동네 깡패 수십 명이 날마다 행패를 부려서 오히려 산속 선교보다 더 어렵고 위험했지요. 그는 이곳 도미니카공화국 사람이지만 사립학교를 나오는 등 어려서부터 안온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열악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빈민촌 선교에 적응하기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2005년 5월 신학대를 졸업했습니다. 신학 공부를 통해 선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졸업 후 선교 열정이 더 깊어져 밤늦게까지 제자들과 상담하고 심방을 하면서 기쁨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됐습니다. 무차아구아 교회 건축, 비전 크리스천 학교 설립, 아이티 교회개척, 아이티 지진 구호사역 등 수많은 사역을 함께 감당한 뒤 미뤄뒀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 지난해 12월에 신학대학원까지 마쳤습니다.
12년째 같이 살고 있는 우리 부부는 자녀를 낳지 않았습니다. 선교지에서 말씀으로 양육하는 모든 제자들이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투자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림, 운동 등 이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고 선교와 제자 양육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해나 희생이 아니라 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가치를 위해 버리는 자는 영원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가치를 발견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때로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믿고 싶습니다. 선교지에서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쓰시고자 맺어주신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선교지에서 위험한 일,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내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줍니다. 때로는 변호사처럼 문제를 해결해주고, 짜증도 스트레스도 받아주고 늘 위로해주는 남편이 고맙습니다. 앞으로 우리 앞날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이 험한 광야의 길을 지혜롭게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지구 반대편 선교지에서 만나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함께 걸어가게 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산속이나 빈민촌 사역도 중요하지만 도심에 개척한 비전교회를 통해 부유층과 지식층에도 복음을 전해 그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진정으로 나누게 함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 부부의 꿈입니다.
김성자 무차아구아감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