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추억의 가족사진
입력 2013-02-18 17:26
소년은 아버지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걷는다. 눈이 수북이 쌓인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버스 종점에서 할아버지 집까지는 10리쯤 되니 그럴 만도 하다. 시골집은 흙벽돌로 벽을 쌓았고, 짚으로 지붕을 인 초가집이었다.
초가집 안방 벽에는 빛바랜 사진들로 채워진 낡은 액자가 걸려 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청년들과 할아버지들이 섞여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한다. “이 사람이 아버지이고, 이분이 너의 할아버지이고, 제일 앞에 앉아계신 분은 너의 증조할아버지이고….”
여남은 명에 대한 설명을 듣지만 돌아서면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1년에 한두 번 뵙는 할아버지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한번도 뵌 적이 없는 이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으리라는 건 애당초 무리였을 것이다. 소년은 그때만 해도 가족사진(家族寫眞)의 소중함을 모른다.
소년이 성장해 결혼을 한다. 첫딸 돌을 맞아 가족사진을 찍는다. 첫아들 돌 때도 마찬가지다. 뒤늦게 시골집에서 사진 속 인물들을 자세히 설명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른다. 자녀의 초·중·고교와 대학 졸업식, 아들이 입대하고 전역하던 날, 첫손주의 돌잔치, 산과 바다로 여행 갔을 때 가족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에도 의미 있는 날에는 가족사진을 남긴다. 세월이 흘러 카메라가 보편화되고, 화질 좋은 휴대전화까지 등장한 다음에는 가족사진이 넘쳐난다. 지금은 가는 곳마다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다. 화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가족사진을 찍고 싶어도 찍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상봉의 자리에 ‘초대’ 받지 못한 남북 이산가족들이다. 만남과 교차방문을 주선해주지는 못하더라도 가족사진을 주고받게 하면 큰 위로가 될 텐데. 하지만 요즘처럼 남북이 대치하면 사진 교환 같은 쉬운 일도 결코 쉽게 성사되지는 않을 것이다.
추억의 가족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미국 우주탐사선 아폴로 16호에 탑승한 찰스 듀크(77)가 1972년 4월 데카르트 고원이라 명명된 달 표면에 비닐로 싼 가족사진을 두고 왔다는 것이다. 듀크는 사진 뒷면에 ‘지구라는 행성에서 온 우주인 듀크의 가족’이란 설명도 남겼다고 한다.
인류 가운데 선택 받은 몇몇만 갈 수 있는 달나라. 미지의 그곳에 기념품으로 남길 사진을 고르면서 듀크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을지 모른다. 지구에 귀환한 뒤에도 그 사진에 얽힌 추억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했으리라.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