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문흥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지속돼야 한다
입력 2013-02-18 17:25
“남북 대화와 교류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동시에 핵 보유의 위험성 경고해야”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주변정세가 뒤숭숭하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것이고 그 시기는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전후일 것이라는 점은 예견된 일이었다. 문제는 핵실험 이후 신정부 출범을 앞둔 우리와 주변 국가, 국제사회의 대응이다.
회고해 보면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비핵화에 합의하고 이듬해 2월 평양의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공동위원회 구성 및 운영합의서를 상호 교환했다. 남북한이 처음으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한반도 비핵화 청사진에 합의하고 실천 의지를 다지는 화해 협력 분위기였다.
당시 통일연구원에 재직했던 필자는 동료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세부 실천 방안을 작성했다. 한반도 평화와 우리 민족의 공존·공영, 더 나아가 통일 과정에 일조한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지금도 그때 그 마음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까지 거친 지금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주변 정세는 20여 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퇴보한 느낌마저 든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 신뢰의 문제다. 우리는 남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관련 당사자들 간의 신뢰 구축에 실패했다. 혹자는 북한 같은 비이성적 집단과 무슨 신뢰 타령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그 역시 신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가 표방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북한의 경거망동에도 불구하고 일보전진, 이보후퇴하는 퇴행적 상황의 타개는 신뢰 회복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불변을 강조했다. 당연한 일이다. 설마 북한의 핵 개발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북정책의 핵심 기조를 설정했겠는가. 대학생들의 기말 보고서도 그 정도의 변수는 고려한다. 주변에서 성급하게 신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신정부의 외교·안보 담당자들도 여론을 의식해 뭔가 강경책을 가미할 것처럼 애쓸 필요 없다. 자칫하면 시행도 하기 전에 이도 저도 아닌 누더기식 정책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내실 있는 한·중 공조를 위해서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근간을 유지해야 한다. 미우나 고우나 현 상황에서 대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이 유일하다. 3차 핵실험 이후 중국의 대북 입장도 예전과 다르며 특히 3월 초 시진핑 체제의 본격 출범을 앞둔 중국은 북한의 도발에 내심 분개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의 대북 경고와 압박 수준이 미흡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들 고유의 방식과 절차, 속도를 이해해야 한다. 겉에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신뢰 프로세스를 크게 변모시켜 강경정책으로 선회한다면 중국의 역할은 의지, 능력 면에서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셋째, 미국에 대한 고려에서도 신뢰 프로세스는 여전히 유용하다. 미국의 입장이 일견 강경해보이지만 그들도 뾰족한 수단이 없으며 은근히 중국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하는 눈치다. 한반도만을 바라볼 수 없는 미국으로서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가 한반도 평화, 안정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중국의 입김이 남북한에 과다하게 확산되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결국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우리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기조 유지와 “핵무기가 없어 소련이 붕괴했는가”라는 박 당선인의 두 명시적 발언을 양쪽 경계로 한 범위 내에서 세부 전략과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즉 대화, 교류를 통해 신뢰를 쌓아 가자는 유화적 원칙과 핵 보유가 체제의 존속을 결코 보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 메시지 사이에서 우리의 정책적 탄력성을 유지해야 한다. 모두가 좀 더 냉정해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문흥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