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정태] 짧은 삶, 큰 울림

입력 2013-02-18 19:11


#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동안 놀던 물인 경기도 미사리 카페촌 라이브 무대는 너무 좁았다. 전국 무대에 오르는 게 꿈이었다. 음악이 바로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대에서 프로 뺨치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노래와 춤, 퍼포먼스는 시청자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꿈과 열정, 투혼, 감동의 무대는 방송 내내 화제였다. 노래는 음원사이트를 휩쓸었다. ‘달의 몰락’ ‘미인’ ‘스윙 베이비’ 등을 뛰어난 가창력과 독창적인 퍼포먼스로 선보여 인기를 얻었다. ‘서쪽 하늘’은 더욱 특별했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배우 장진영의 유작영화 ‘청연’ 삽입곡을 애절하게 불러 심금을 울렸다.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 임윤택

그룹의 리더는 어린 시절 춤을 통해 꿈을 꾸었다. 중학교 때 춤꾼의 길로 들어가 각종 대회에서 우승했다. 고교 시절 방황하기도 했지만 서울예대에 진학한 뒤 댄스그룹을 결성해 활동했다. 그리고 미사리 공연장의 트렌드를 바꾸어놓은 주역이 됐다. 발라드 위주의 공연을 하던 미사리에서 아카펠라 하모니와 댄스 퍼포먼스 등 새로운 스타일을 내놓아 폭발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도전한 2011년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3’. 그룹 울랄라세션과 리더 임윤택이 15년 무명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무대였다.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고 했던가.

# 삶은 짧았다. 고(故) 임윤택. 장진영과 같은 위암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자 연예계 인사들과 수많은 팬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멘토인 소설가 이외수는 “누구보다 진실했고, 열정적이었고, 위대한 생애를 살았다”고 애도했다. 청와대 또한 이례적으로 트위터를 통해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기적을 보여주었던 고 임윤택님의 명복을 빈다”며 추모 사진을 게재했다. 지난 14일 영결식이 치러져 고인을 보냈으나 아직도 추모 열기와 추모 특집 방송은 이어지고 있다.

불과 ‘경력’ 2년밖에 안 된 엔터테이너의 죽음에 사회적 반향이 큰 것은 왜일까. 그의 긍정적 삶이 사회의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2011년 1월 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긍정의 힘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암은 나를 찾아왔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제는 이 무서운 병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계획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팀원들의 미래를 위해 결정한 게 ‘슈퍼스타K3’ 참가였고, 결국 가수 데뷔의 꿈을 이뤘다. 위암을 의심하는 악성 댓글로 상처도 입었지만 악플러들을 고소하자는 사람들을 말리는 너그러움까지 보였다.

이 시대의 청춘 아이콘이다

# 울림은 컸다. 먼저 생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산 데 대한 감동이다. 누구나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아니라고 하지 말고’라는 자전에세이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보여줬다. 그리고 꿈과 희망을 노래했다. 긍정하고 또 긍정하라는 게 그의 메시지였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강연 등을 통해 희망 메신저 역할을 감당했다. 치료비 때문에 고통 받는 암병동 환우들을 남몰래 돕기도 하고, 재능기부에도 앞장서며 환우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가족에게는 자상한 남편이요 아빠였다. 죽는 그날까지 밝은 모습으로 대했다. 죽음 앞에서도 “너무 슬퍼 마라”며 오히려 가족, 동료, 회사를 걱정할 정도로 의연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당당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첫 번째 이유일 것”이라고 한 임윤택. 그 말처럼 너무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았다. 희망과 긍정의 바이러스를 전파한 이 시대의 청춘 아이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을 것이다.

박정태 문화생활부장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