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3) 아버지, 물에 빠진 보육원생 구하다 33세에 소천
입력 2013-02-18 17:42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신앙생활에 열중이시던 모습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입대해 보병 장교가 되셨다. 초등학교 1, 2학년 시절, 토요일이면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대에 놀러가곤 했다. 병사들은 어린 나를 무척 귀여워해주었고 간혹 생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나 모형 자동차와 같은 조그만 선물을 건네주기도 했다. 나에 대한 병사들의 사랑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식사 시간마다 병사들의 배식이 끝나면 막사를 돌며 식사기도를 하셨다. 기도는 식사에 대한 감사 기도의 성격을 넘어 고향에 계신 병사들의 부모님과 가족을 위한 기도의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식사 후 아버지는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병사들의 식기에 일일이 물을 따라주셨다.
아버지는 동두천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분이다. 군에서 자재를 공급받고 병사들을 동원해 교회를 지은 것이다. 이제는 화재로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목조건물이던 동두천감리교회가 아버지께서 지으신 교회다. 전역 후에는 동두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동성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열정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군에서 예편한 직후 잠시 양계장을 운영했다. 아버지의 일과는 집에서 30여분 떨어진 교회에 새벽기도를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나이 많은 걸인 한 사람과 마주쳤다. 아버지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에게 입혀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는지 걸인을 집으로 데려와 아침식사를 대접해 보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새벽기도를 갔던 아버지가 뜻밖의 손님을 모시고 왔다. 잔뜩 겁에 질린 손님은 양손에 닭 두 마리를 거머쥐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는 손님과는 대조적으로 상기된 표정이었다. “여보,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닭을 두 마리나 내려주셨어요. 어서 아침 준비하구려.”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셨다. 그즈음 우리 양계장에는 종종 밤손님이 찾아와 닭을 훔쳐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날 손님은 운이 나쁘게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던 아버지에게 덜미가 잡힌 것이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닭 도둑에게 식사를 대접해 보냈다. 속이 터지는 것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군에 복무하실 때도 집안 살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버지의 급여는 병사들이 휴가 떠날 때 부모님 선물 사라고 교통비 하라고 나눠주고, 길거리 불우한 사람들 식사하라며 주고, 교회에 헌금하느라 바닥이 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장사를 해서 집안 살림을 꾸려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5월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교회에 가시던 아버지는 100명이 넘는 고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성학이란 원생이 물에 빠진 걸 보고 물에 뛰어드셨다가 목숨을 잃으셨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아직도 기억에 남는 추도사의 한 구절이 있다.
“오종섭 집사님은 서른 세 살의 나이, 꼭 예수님만큼만 세상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처럼 그는 고아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가셨지만 그가 남긴 많은 일들과 거룩한 죽음은 우리의 가슴속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진 동산에 무덤 두 기가 나란히 생겼다. 하나는 아버지의 무덤, 다른 하나는 그 고아의 무덤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