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찬희] ‘세종대왕’의 고민

입력 2013-02-17 18:31

1만원 지폐 앞면 세종대왕 초상의 왼쪽 윗부분에는 ‘한국은행’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공식화폐라는 표식이다.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은 은행의 은행, 정부의 은행으로 불린다.

중앙은행은 애초 왕실이나 정부의 재정수요를 충당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화폐 발행으로 얻는 이익을 대가로 정부나 왕실에 돈을 대주는 역할을 했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은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에 돈이 필요했던 윌리엄 3세가 1694년 윌리엄 패터슨이라는 금융인에게서 자금을 빌리는 대가로 대출업과 화폐 독점발행권을 인가하면서 출발했다. 잉글랜드은행은 1844년 독점적 발권은행이 됐고, 1946년 국유화됐다.

권력과 금융의 결탁이라는 태생 때문인지 초기 중앙은행은 탐욕스러웠다. 화폐 발행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바람에 돈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물가가 천문학적으로 뛰었다. 국가 경제는 파탄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각국은 통화가치·물가 안정에 주목했다. 앞다퉈 특별법을 만들고 중앙은행에 독립성을 보장했다.

한국은행도 특별법인 한국은행법 제1조 제1항에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가가 안정되지 못하면 불확실성이 높아져 전반적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소득·자원 배분이 왜곡되며, 서민생활이 붕괴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물가상승 목표제를 들고 나왔다. 정부 뜻에 따라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야 하는 ‘인쇄기’ 신세로 전락했다. 미국에서는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고용과 경기회복까지 챙긴다.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도 기존 가치·목표를 부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긴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기침체라는 위기 속에서 인쇄기를 돌려 경기를 끌어올리는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돈을 찍어낸다고 일자리가 늘고, 경기가 살아난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적절한 수준의 경기후퇴를 견디지 못하고 ‘인플레이션 몬스터’(물가폭등이라는 괴물)를 풀어놓으면 거품 유발, 물가 폭등, 서민경제 붕괴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금융위기가 더 잦아질 수도 있다. 이래저래 ‘세종대왕’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김찬희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