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태만] 100번째 소신, 말하라 미국

입력 2013-02-17 17:20


안타깝게도 100번째 소신공양(燒身供養) 희생자가 티베트에서 발생했다. 하나같이 ‘티베트 독립’과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요구해 소신한 티베트인이다. 현실의 고통과 마주한 죽음의 메시지는 해방임이 분명하다.

제 살에 불을 붙이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극단적인 육신의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 종교 의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같은 극단적인 방식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1963년 사이공의 길 한복판에서 벌어진 틱 쿠앙 둑 승려의 소신은충격이었다. 독재와 불교탄압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후 수많은 소신이 이어졌고, 결국 남(南) 베트남의 독재정권은 종식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 1998년 ‘통일 조국’ 등을 발원한 충담 승려 등이다. 권력으로부터 자주권을 박탈당한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한족과는 전혀 다른 언어와 종교, 문화를 가진 공동체인 티베트가 중국에 편입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역사적으로는 티베트가 독립 국가였다는 주장과 중국 중앙 정부의 지배권 아래 자치를 행하는 속국이었다는 양론이 병존한다.

청조는 열강들의 식민 침탈에서 티베트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자국의 주권이 미치는 ‘속지(屬地)’라 주장해 왔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하면서 중국에 투쟁했다. 한동안 자율권을 회복하는가 싶더니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진주한 인민해방군에 점령당하면서 중국정부의 행정, 군사 지배 하에 놓였다. 1951년 ‘화평해방 17개조 협의’ 등에도 불구하고 민족, 종교, 자원, 산업, 교육, 문화 등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없었다.

1959년 3월 라싸에서 대규모 무장봉기 이래 티베트인들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다. ‘티베트 인민의 인권과 자유의 존중’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인도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가 수립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정부를 대표해 티베트 문제의 실상을 알리며 국제사회로부터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신과 시위, 중국 정부의 폭력적 대응은 쳇바퀴처럼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철저히 당근과 채찍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변경 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시혜정책으로 공장 유치, 관광과 자원 개발, 교육과 의료 지원 등이 대폭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징짱(京藏) 고속철은 자본의 야욕을 티베트 내부 깊숙이 끌어들이는 빨대가 되었고, 티베트는 중국의 수직적 분업 체제에 편입되어 결국 내부 식민지로 전락했다.

때문에 작금의 티베트 문제를 자유와 인권, 종교와 민족 문제로만 이해하는 것은 단견이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티베트의 저항이 상당 부분 중국의 개혁개방과 전지구적 자본화의 산물이고, 게다가 국제정치 역학 관계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이 티베트에 막대한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회주의 중국 견제를 위해 티베트가 중요한 교두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미수교 이후 관계의 변화에 따라 티베트는 점차 미국의 지원대상에서 제외되어 갔다.

문제는 미국이 티베트에 관한 한 입을 닫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달 양회를 거치며 정식 국가주석 직에 오를 시진핑에 희망을 거는 측도 있다.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이 생전에 티베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강경 정책을 반대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근본적인 티베트 문제의 해결사는 미국일 수밖에 없다. 향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 펼쳐질 대 아시아 전선이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 동아시아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