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세계 최고 교육 받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中企경쟁력 밑바탕”
입력 2013-02-17 22:50
인터뷰 -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
롤프 마파엘(58) 주한 독일대사는 인터뷰 도중 서울에서 열린 반도체 관련 기업 박람회에 참여한 독일 중견기업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독일은 일단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가 비슷하고 사회복지에 대한 고민도 비슷해 앞으로 긴밀한 교류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경제 외교에 쏟는 마파엘 대사의 관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 동빙고동 독일대사관의 집무실에서 지난 7일 오전에 만난 마파엘 대사는 “국민일보가 독일에 많은 관심 가져줘 고맙다”고 먼저 인사했다. 90분 동안 그를 만났다.
만난 사람=신종수 산업부장
-올해는 한국과 독일의 수교 130주년이다. 두 나라 정상이 만날 기회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초청장을 보냈다. 올해 안으로 만남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독일과 한국의 협력은 박근혜 정부가 끌고 갈 기본 구상에 맞춰서 이뤄질 것이다. 두 나라는 경제 구조가 비슷해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 개혁, 인구 변화로 인한 도전도 공통적인 관심사다. 박근혜 당선인이 연구개발 즉 기술 혁신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분야에서도 한·독 관계에 발전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 당선인과 메르켈 총리는 여성으로서 최고지도자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뿐 아니라 두 분 다 이공계 출신이다. 이과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고방식도 비슷할 것으로 추측한다.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 두 분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본다. 가장 좋은 점은 두 정상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메르켈은 통합과 화합의 리더십으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중요한 정치 현안에서 각 정당의 의견을 경청한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도 뛰어나다. 그것이 통합의 열쇠인 것 같다. 빠르고 쉬운 길로 가기보다 시간을 두고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도록 기다린다. 현안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길 기다리고 그것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독일 국민들이 메르켈 총리에게 깊은 신뢰를 갖고 존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복잡한 현안이 있을 때 그 복잡한 모든 면을 다 깊이 들여다보고 분석해서 모든 측면을 고려한 뒤 가장 균형 잡힌 해결책을 내놓는다. 사실 메르켈 총리가 처음 총리가 됐을 때는 사람들이 너무 우유부단하지 않느냐는 걱정을 했다. 지금은 그것이 결단력 부족이 아니라 사안에서 모든 측면을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을 이루는 중요한 기반은 무엇인가.
“모든 정치 지도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를 국민에게 설득해야 한다. 설득이야말로 리더십의 핵심이다. 설득의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설득 능력도 발전을 한다. 박근혜 당선인도 소통을 잘해서 당선된 것 아닌가. 메르켈 총리도 정권 초창기 인선 과정에서 불투명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인사는 정치 지도자의 스타일대로 하는 것이다. 지금은 메르켈의 인선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도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독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특히 중소기업의 강한 체질은 인상적이다.
“독일에서 말하는 ‘중견기업’은 구체적으로는 종업원이 25∼500명, 연 매출 5000만 유로 미만인 기업이다. 독일의 중견기업이 강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국가 차원의 지원이다. 중소기업은 창업 초기 자금 조달이 어렵다. 이를 위해 특별대출 제도를 실시한다. 또 연구 시설을 직접 운영하기에는 부담이 있는 만큼 관련 시설도 지원한다. 두 번째 요인은 독일의 경제구조인데, 독일의 대기업은 특정 산업에 집중한다. 한국의 대기업 같은 다각화 구조가 없다. 독일 대기업은 자신의 영역 즉 핵심 산업에 집중한다. 주변 산업에 중소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세 번째는 독일이 가진 수백 년의 연방국가 전통이다. 중앙집권적이지 않다. 경제중심지가 여러 곳에 형성돼 있다. 각 지역별로 자신들의 경제적 역동성을 키워왔다. 또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해외시장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 다른 요인은 기업가 정신과 교육의 질이다. 사실 독일 중소기업이 ‘히든챔피언’이라 불리는 가장 큰 비결은 독일의 엔지니어 교육이다. 독일의 엔지니어 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들이 신기술을 발명하는 것이 중소기업 경쟁력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사례를 들어줄 수 있나.
“한국에서 반도체 관련 전시회가 열렸는데, 독일 중견기업도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참여했다. 그 곳에서 만난 한 독일 기업은 실리콘 웨이퍼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고가의 액체를 재활용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국가라면 어디든 가서 이 기술을 판매한다. 직원은 50명밖에 안 된다. 또 다른 업체는 차량용 블랙박스의 각종 차량과 센서를 기록하고 전송하는 케이블을 생산한다. 이 기술 역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도 종업원이 50명이 안 된다. 이런 기업가 정신, 시장 개척 정신과 기술력, 창의력이 있기 때문에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이런 기업가 정신은 프로테스탄트적인 소명 의식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독일 사회의 가치관은 분명히 기독교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노동 윤리와 사회 윤리에 실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막스 베버는 기독교적 윤리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했다. 독일의 노동자 권리와 사회복지가 꾸준히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노동윤리와 사회윤리가 큰 영향을 끼쳤다. 구체적으로 사회복지와 노동자의 경영 참여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
-독일은 이미 20여년 전에 통일을 이뤘다. 통일을 먼저 이룬 선배로서 조언해 달라.
“1969년 시작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부터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독일이 어떤 정책을 이어왔는지, 또 그 뒤 통일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은 결국 한국의 과제다. 대신 독일 정부는 통일 과정의 정보를 가능한 많이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다. 올해도 한·독 간 통일 분야에 고위 전문가 회담이 계속되길 희망한다.”
-통일이 가져올 혼란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통일 과정에서 서독의 재정적인 부담도 컸다. 당시 상황에서 동서독 화폐 통합을 신속하게 할 수밖에 없어 초창기 비용이 높았다. 그러나 지금 평가를 해보면 통일 비용은 빠르게 줄었고, 투자로 인한 혜택은 비교적 빠르게 늘었다. 내년이 통독 25주년인데, 그 시점이면 통일 비용과 혜택이 상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89년 이후에 태어난 독일의 젊은이들은 분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상상도 안 될 것이다.”
-독일은 북한과 수교 관계에 있다.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가.
“연방정부는 최근의 북한 사태를 지극히 우려한다. 2월 12일의 핵실험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다. 연방정부는 이번 핵실험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국제사회는 명확한 입장으로 대응해야 하며 북한 정권에 대한 추가적인 제재를 고려해야 한다.”
-올해는 독일 광부 파견 50주년이기도 하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두 나라 교역이 2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을 찾은 독일 방문객이 2000∼2012년 사이 5만명에서 10만명으로 역시 2배 늘었다. G20에서도 두 나라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함께 세계에 기여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주한 대사관에서는 올해 독일어 교육을 장려하는데 중점을 두려 한다. 한국의 제2외국어 정책이 2008년 바뀌면서 독일어를 배우는 학생이 3만3000명에서 1만6000명으로 절반이나 줄었다. 지난해 대구에 독일문화원을 개원한 데 이어 올봄에는 독일유럽연구소를 개설할 예정이다. 또 하나의 핵심 사업은 과학 기술 분야의 협력이다. 한국의 새 정부가 기초교육 분야 투자를 약속한 만큼 앞으로 협력할 부분이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마파엘 대사는
롤프 마파엘 독일 대사(58)는 검사 출신이지만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하이델베르크대와 베를린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사법시험을 통과한 뒤 만하임 검찰청에서 근무했다. 이어 1985년부터 서독 외무부에서 일하면서 외교 분야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제네바(89~93년), 테헤란(93~95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95~98년), 북대서양조약기구 상설대표부(98~99년)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주일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한 뒤 유럽정책조정과장을 거쳐 지난해 7월 한국에 부임했다. 슬하에 자녀 5명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