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동트는 동해에서
입력 2013-02-17 17:44
지인들과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설 연휴가 지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낸다는 게 눈치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동안 매번 나의 바쁘다는 핑계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여행이었다. 해서 몇 달 전부터 이번 여행은 어떤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기필코 떠나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그러니 하루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가기 위해서 이번 주 내내 자정까지 야근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 퇴근해야 했던 건 내 탓이지 남 탓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루 휴가를 내기 위해서 며칠 동안 자정까지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꼭 내 탓이기만 한 것일까.
함께 여행을 떠난 우리 넷은 한때 같은 직장에 다녔던 직장동료다. 매일매일 같은 사무실에 출근해 웃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파이팅했던 시간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각자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래서 처한 상황도 처지도 신분 변화도 달라졌다.
공공 문화 예술 행정 기관의 정규직이 된 J와 무기계약직이 된 A는 상대적으로 고용 불안에서는 놓여났지만 업무량이 과다해서 늘 야근을 달고 산다.
그에 비해 박봉에도 불구하고 열정 하나로 이 바닥에서 10년 이상 열심히 일해 온 경험과 경력이 존중되기는커녕 지난 시간 전체를 기계적인 평가에 의해 헐값에 매도당하며 하루아침에 쇄신 대상이 되어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인 Y는 요새 수시로 덮쳐 오는 허무와 불안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K도 강도는 다르지만 별반 다르지 않고.
일기예보는 눈이 내릴 거라고 했지만 그쯤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열정과 진심은 소용없고 기계적인 평가와 규정만이 힘을 발휘하는 세계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예보대로 진눈깨비가 휘날렸지만 우리는 아랑곳없이 진눈깨비 속을 헤치며 정동진역과 묵호항 수산시장을 구경했다. 촛대바위가 절경을 이루는 추암 바닷가 옆에서 해가 뜨도록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고 웃었다. 울지는 않았다. 칠흑처럼 캄캄한 겨울 밤바다가 대신 울어주고 있었으므로.
누군가 여행은 가까운 것을 찾으러 먼 곳을 가는, 먼 것을 찾으러 가까운 곳을 가는 마음의 방황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함께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 진담하면서 가까운 것도 먼 것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을 다시 찾고 있었다. ‘동(動)트는 동해’에서.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