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베를린의 통역가
입력 2013-02-17 17:44
그녀는 앙증맞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이런 날씨에 자전거를 타요?” 놀라는 내게 그래서 이렇게 입었잖아요, 목까지 올라오는 두툼한 빨간 누비점퍼에 장갑을 가리켰다. 화장기 없는 민낯에 생머리 단발, 동그란 얼굴이 배시시 웃었다. 눈발이 날리는 춥고 낯선 도시 독일의 베를린에서 이틀사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전날 그녀에게 사소한 실수를 했다. 왼손엔 베를린 지도를, 오른손에는 스마트폰의 구글맵을 켜고 인터뷰 장소를 찾던 참이었다. 주소의 숫자 하나가 지워진 걸 모른 채 ‘42번가’ 대신 ‘4번가’ 앞에서 헤매고 있을 때 빨간 점퍼의 동양 여인이 다가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멀쩡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온 기자세요?”라고 했다는데 우습게도 “미안해요, 독일어 못해요” 이런 말을 영어로 웅얼거렸다. 한참 뒤 인터뷰 자리에 약속했던 통역자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아까 그 빨간 점퍼의 여인이었다. 택시를 잡아탄 사이 그는 4번가에서 42번가까지 걸어온 모양이었다.
“책 좋아해요? 좋아하면 줄게요.” 두 번째 만남에서 그는 세발자전거 짐바구니에 싣고 온 책 세권을 건넸다. 자신이 번역한 독일 작가의 소설이었다. 독일에 온 지 20여년. 그 사이 그녀는 철학 석사를 마쳤고 20여권의 독일 소설과 철학서, 아동책을 번역했다. “독어가 자유로워지는 만큼 한국어 어휘를 자꾸 잊어요. 두 가지를 함께 유지한다는 게 정말 어려워요.” 번역서 속 유려한 문장이 무색해질 만큼 그녀는 진지하게 걱정했다.
노력에 비하면 수입은 많지 않았다. 알아주는 독문학 번역가에 짬짬이 통역도 하는 그녀의 연 수입은 6000유로(약 860여만원) 정도. 투자 대비 산출로 따지자면 한참 밑지는 장사다. 그래도 그에게는 독일이어서 가능한 삶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는 듯했다.
그는 자신 같은 저소득 예술가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제도를 예로 들었다. 한국인들은 숫자를 대야 믿으니까. 1981년 시작된 ‘예술가 사회보험법’에 따라 독일 정부는 프리랜서의 의료보험 및 국민연금 보험료의 절반을 보조해준다. 그의 경우에는 월 100유로에 조금 못 미치는 지원금을 받았다.
꼼꼼한 복지가 고맙긴 하지만 신뢰가 몇 푼 보조금에서 싹튼 건 아니었다. 그는 독일 복지제도 자체보다는 그런 제도를 합의해낸 독일 사회, 그 바탕에 깔린 ‘모든 개인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권의식’에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줬다. 어릴 적 뇌성마비를 앓았다는 그는 말도, 몸놀림도 남보다 느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오기까지 한국에서는 한번도 잊지 못했던 자신의 장애. 그는 독일에 머문 지난 20여년간 자신이 느리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내가 나라는 걸 잊을 시간을 주지 않아요. ‘어머 힘들겠다’ 하면서 동정을 하든지, 하다못해 ‘장애를 이겨내다니 참 대단해’ 칭찬하든지. 온 사회가 내 장애를 절대 잊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해요. 그게 참 지겨웠어요.” 베를린에서 두발자전거를 탈 수 없는 그녀는 세발자전거를 탔다. 그녀의 느린 세발자전거는 비난도 칭찬도, 심지어 주목조차 받지 않았다.
왜 그녀의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던 걸까. 독일 거리에서 독일어를 예상한 건 당연한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어눌한 통역가를 상상 못한 무의식의 편견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그토록 지겨워했던 ‘장애를 일깨우는’ 한국 사회의 시선 속에 내 것은 없었는지.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영미 정책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