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2) 내 유년의 8할은 아버지가 일하던 보육원 종소리

입력 2013-02-17 16:48


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리 38번지. 경원선을 타고 가다 동두천역에 내리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육원이 하나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그 보육원은 오래전 문을 닫았지만 그곳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흔적들은 아직도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 5월, 우리 가족은 보육원에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그곳으로 이사했다. 안흥리에 대한 첫 인상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교회 옆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 정차했을 때 교회 옆으로 흘러내리는 냇가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무거운 해머로 냇가의 큰 돌을 내리치면 그 밑에 있던 물고기들이 기절해 떠오르고 애들은 그 물고기를 건져내곤 했다.

신앙심이 깊으셨던 아버지는 보육원 일을 하시며 그곳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교회를 증축하는 일에 여념이 없으셨다. 나와 내 동생은 보육원에서 살면서 원생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끔찍한 종소리의 시그널이다. 내가 종소리에 대한 낭만을 잃어버린 것은 어린시절 보육원의 종소리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보육원 사무실 앞 왼쪽에 미군 탱크의 톱니바퀴를 쇠사슬로 매달아 붉은 페인트칠을 해놓은 육중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통솔하는 수단은 종소리였다.

종소리가 ‘땡땡 땡땡’ 두 번씩 울리면 식사시간을 알리는 신호요, ‘땡땡땡 땡땡땡’ 세 번씩 울리면 소리를 듣는 즉시 모이라는 신호다. ‘땡땡땡땡…’ 연속적으로 울리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상황을 알리는 비상 신호다. 종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이들을 곤한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식당으로 모이게 했으며 흩어져 놀던 아이들을 보육원 앞마당에 줄 서게 했다.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는 보육원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소리였다. 추석과 크리스마스, 설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외 없이 나오는 메뉴가 있었다. 아침과 저녁은 보리와 옥수수가루가 반반씩 섞인 밥에 시래깃국 김치와 새우젓이다. 점심엔 밀기울로 만든 수제비나 옥수수가루로 쑨 죽이 배급됐다.

보육원에서는 마치 생선가게 생선을 크기대로 분류하는 것처럼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나이와 덩치에 따라 소치, 중치, 대치로 나누어 배식할 때 양을 달리했다. 아무리 먹어도 늘 허기를 느끼는 아이들은 소치에서 중치로 편입되거나 중치에서 대치로 편입되는 것을 군대에서 진급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아멘.”

그 시절 이 노래를 참 지겹게도 불렀다. 식사기도인 셈이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불러야 했는데 기도하는 동안 자신의 밥이 도난당하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밥그릇을 덮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실눈을 뜨고 주변 경계를 하면서 목청만 높여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식사시간뿐만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손님이 방문할 때면 우리는 ‘땡땡땡 땡땡땡’ 즉시 집합 소리를 듣고 달려와 손님을 위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손님은 대부분 미군 병사들이었다. 일요일이면 미군 병사들의 예배시간에 성가를 해주기 위해 미군부대 내에 있는 교회로 갔다. 예배가 끝나면 한 주 동안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보리밥과 새우젓을 싫어하던 내게는 미군 병사들과 함께하는 그 식사야말로 한 주 동안 허기진 배를 채우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곰처럼 다음 일요일이 되기까지 영양을 비축하는 시간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