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박세록] “北은 사상범, 南선 빨갱이 취급… 하나님께 쓰임이 많을 뿐”
입력 2013-02-15 17:41
26년째 북한 의료지원 ‘샘복지재단’ 박세록 대표
“북한 선교를 결심한 이후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이죠. ‘이건 반드시 돼야 합니다’라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안 이뤄진 일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26년간 북한에 병원을 세우고 의료봉사를 다니며 식료품·의약품 등 구호물품을 전달해 온 박세록(75) 샘복지재단 대표의 말이다. 칠순을 훌쩍 넘긴 노의사는 한국과 미국, 중국을 누비며 북한 의료체계 지원과 취약계층을 돕기 위해 힘썼던 지난 세월을 ‘기적’이란 단어로 정의했다.
1988년 북한 정부의 요청으로 대북 의료 지원을 시작한 박 대표는 북한이 자연재해, 전염병, 기아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사재를 털고 후원자를 모아 북한을 도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대와 모함뿐. 주변의 온갖 비난과 우려를 무릅쓰고 95년 개원한 평양 제3병원은 북한으로부터 출입금지를 당하면서 설립자 명의를 내줘야만 했다. 그는 이때를 포함해 북한 정부로부터 출입금지령을 세 번 더 받았다. 그가 꾸린 의료봉사단의 방북이 돌연 취소되고 북한 고아원에 전달되어야 할 식량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일도 종종 생겼다. 대부분 북한에서 그의 신앙을 문제 삼아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97년 샘복지재단을 설립한 그는 북한 내 활동이 금지되자 중국의 북한 접경지역과 조선족에 눈을 돌렸다. 조선족과 북한인, 고려인이 모여 있는 동북지역이 북한 선교의 요충지라 확신한 그는 2000년 단둥복지병원을 세우고 대북 의료봉사와 구호물품 전달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또 북한의 요구사항에 대처하고 원활한 물품 수송을 위해 미국, 중국, 호주 등에 재단 지부를 세웠다.
“20년 넘게 이 일을 했지만 아직도 문을 여는 데 인색한 북한과 저를 모함하는 이들을 보면서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 치의 오차 없이 뜻을 이뤄가는 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니까 모든 게 이해가 되고 원망과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제가 두려움 없이 감사로 일하는 것 또한 기적이 아닐까요.”
가난이 싫던 악바리 의사가 의료선교사로
3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이 싫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세는 급속히 기울었고 5남매의 맏이인 그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키 위해 재수를 해야만 했다. 의사가 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던 박 대표는 서울대학교 의대에 지원했다. 문제는 등록금이었다. 국립대라 등록금은 사립대의 10분의 1 정도였지만 김 대표는 그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다. 남대문에서 노점상을 하던 아버지는 납기일 직전 급전으로 돈을 마련해 그에게 내밀었다. 돈 뭉치를 받은 그는 학교로 달려가 등록했고 급전 생각은 잊은 채 공부에만 몰두했다. 고금리의 채무는 고스란히 아버지 부담이 됐다. 빚 독촉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혈압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46세에 돌아가셨다. 의대에 입학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순식간에 5남매의 가장이 된 박 대표가 기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그가 믿을 구석이라곤 오로지 자신의 실력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의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한 박 대표는 66년 미국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대학병원 인턴 월급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한창 공부하던 동생들과 고생한 어머니에게 다시 가난으로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군의관 시절 만난 아내와 결혼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악바리처럼 공부했다. 72년 그는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여성 호르몬과 불임 전문의 수련을 마쳐 전문의 자격 2개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미시건주 웨인주립대학 부교수와 캘리포니아주 UC데이비스 의대 정교수로 채용됐다.
전문의가 되고부터 가난은 그에게 ‘먼 나라의 일’이 됐다. 24시간 당직을 서면 산부인과 환자들이 결제한 수표가 무더기로 쌓여 다음날엔 쓰레기로 오인하고 버릴 정도였다. 여유가 생기자 그는 호수와 골프장이 있는 저택을 구입했고 수천만원이 드는 사립학교에 자녀들을 진학시켰다.
아쉬울 게 없던 시절, 박 대표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성경공부였다. 독실한 아내 덕에 교회 장로가 됐지만 형식적인 교인일 뿐 신앙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출석하던 교회 목사는 그에게 전 교인 성경공부를 이끌 것을 부탁했다. 잠시 맡을 것 같던 성경공부 인도는 7년째 이어졌고 이는 그가 회심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성경을 잘 모르는 제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선 참고문헌을 찾아 성경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죠. 이를 위해 시카고 휘튼대학교에 등록해 1년간 신학공부도 했어요. 말씀 공부를 하다 보니 취미였던 골프와 여행도 재미가 없어지고 말씀만 계속 생각나더군요.”
성경말씀에 시나브로 마음 문을 연 박 대표가 스스로를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게 된 건 86년 인도에 교육연수 및 선교여행을 다녀오고부터다. 의대 학장 지시로 인도에 다녀온 그는 자신 외에도 어려운 환경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화장터에서 고작 한줌의 재로 변하는 인간을 보며 ‘가치 있는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미주한국일보에 건강칼럼을 연재하던 그는 인도 선교여행 이후 느낀 바를 썼고 이에 감동한 독자들이 인도 선교에 보태 달라며 헌금을 보내왔다. 박 대표는 이 돈을 현지 선교사에게 보내 뉴델리에 신학교를 세웠고 10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간 나를 위해, 성공을 위해 살아왔는데 더 이상 이렇게 삶을 허비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뜻하지 않게 인도 선교 헌금이 모이고 신학교가 세워지는 걸 보면서 ‘인도 선교’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거듭된 오해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
인도 선교에 힘쓰던 어느 날, 박 대표는 일본 도쿄로 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발신자가 표기되지 않은 이 편지는 북한 정부가 보낸 것이었다. 신문에 실린 박 대표의 글을 인상 깊게 봤으니 동포로서 인도 대신 평양에 와 의료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88년 북한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박 대표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당시만 해도 ‘미지의 세계’였던 북한에 홀로 간다는 건 목숨을 건 모험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고 걱정됐지만 아내와 기도하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북한 선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외과의사인 후배와 함께 북한에 가 병원 상황을 돌아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눈으로 확인한 북한 병원의 현실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북한에 미국처럼 현대식 병원을 짓겠다는 결심을 한 박 대표는 미국과 한국 교회에 찾아가 북한 병원 건립 모금을 호소했다. 여러 교회를 다니며 목회자와 성도에게 호소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북한에 병원을 짓는다니, 빨갱이다’ ‘북으로부터 무슨 지령을 받고 왔느냐’는 질문만 받았을 뿐 헌금은 조금도 모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미국에 있는 100만 달러 상당의 부동산과 건물을 처분해 95년 평양광복거리에 평양제3병원을 세웠다. 그의 바람대로 500개의 침대와 최신식 의료장비를 갖춘 병원이 평양시내에 들어선 것이다. 이 병원에서 그는 외국인 최초로 북한 환자에게 개복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정부는 박 대표에게 ‘포교를 통한 체제문란’이란 죄목으로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동역자 한 사람이 그가 국내 여러 교회에 모금을 다니며 북한의 실상을 밝힌 것을 구실 삼아 북한 관리에게 강연 테이프를 넘긴 게 화근이었다. 남한에서 ‘빨갱이’ 소리를 들었던 그가 북한에선 한순간에 교회 사상을 퍼뜨리는 정치범이 됐다.
모함과 악의적인 소문으로 인한 오해는 97년 샘복지재단을 설립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됐다. 동역자 가운데 일부는 내부 정보를 빼내가거나 실제 북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며 박 대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박 대표의 북한 선교를 두고 계속된 안팎의 오해는 그의 신앙 성장과 사역 확장의 자양분이 됐다. 북한 입국이 금지되고 구호물품 반입이 어려워지면서 ‘강변 사역’으로 불리는 중국의 북한 접경지역 사역이 시작됐다. 그 결과 단둥복지병원이 세워졌고 조선족과 북한주민, 오지의 중국인을 동시에 돕는 길이 마련됐다. 지금은 중단됐으나 500여개의 의료품을 담아 북한 5000여개 진료소에 보내는 ‘사랑의 왕진가방’ 역시 어려움을 겪은 이후 진행된 사업이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하다보니 배운 게 많아요. 제3병원을 지을 때만 해도 제가 가진 돈, 재능이 없으면 다 망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무것 없이도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먹여주세요. 12년 전 단둥복지병원 설립부터 지금까지 환자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 주는 데 예산이 모자랐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제 돈으로 사역할 때와는 다른 은혜를 누리면서 무엇보다도 저 자신의 신앙이 더 커진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명자로 산다는 것
박 대표가 26년간 북한 안팎에서 북한 주민을 도우며 얻게 된 결론은 이들이 ‘세계 선교의 첨병’이란 것이다.
“한때 ‘사랑의 하나님이 왜 북한 주민을 오랜 기간 힘들게 하실까. 내가 받은 사랑의 천만 분의 일만 베풀어도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아가진 않을 텐데’란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현장에서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께서 북한 사람들을 세계 선교에 쓰시기 위해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고통이 담긴 이들의 간증은 복음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전할 겁니다. 그래서 전 더 이상 북한 주민들을 보며 가슴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귀하게 쓰일 민족으로 선택받았으니까요. 오히려 불쌍한 사람은 우리입니다.”
북한 주민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날이 오기까지 이들의 병을 치유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게 박 대표의 소명이다. 이를 위해 그는 굶주린 아이들의 영양 공급을 위한 특별영양치료식품(RUTF)과 특별영양보조식품(RUSF)을 만들었다. 국내 대기업과의 기술 제휴로 제작된 이들 영양특별식품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어린이에게 배포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유니세프와 정식 파트너십도 체결할 예정이다.
‘기독교 포교’란 명목으로 북한으로부터 여러 번 제재를 받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북한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북한 내부에서 성경과 하나님을 말할 수 없지만 그를 비롯한 의료봉사단은 눈빛으로 사랑을 전한다. 단둥에서 만난 북한 주민도 역시 사랑으로 돌보며 행동으로 복음을 전한다.
더 많은 북한 주민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또 한명의 사명자’를 찾고 있다. 단둥복지병원에 더 많은 의사가 와 북한 의료봉사에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의 뒤를 이어 샘복지재단을 맡을 일꾼도 함께 구한다. 새로운 사명자들이 단둥복지병원을 세브란스병원이나 광주기독병원, 전주예수병원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선교병원으로 자리잡게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던 그는 인터뷰 도중 말씀을 조용히 되뇌며 눈물을 흘렸다.
“이 일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만사를 봐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명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보낸 자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사명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내가 죽고 예수만 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참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