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입양인 출신 제인 정 트렌카 장편소설 ‘덧없는 환영들’… 두 개 모국을 가진 이방인의 낯선 귀환
입력 2013-02-14 17:24
“십년 새 여섯 번째 오는 한국. 2005년 늦여름, 이혼을 막 매듭지었다. 공연장에서는 뮤지컬 ‘헤드윅’이 상연되고 있다. 금발 가발을 쓴 한국인이 여자인 척하는 독일 남자를 연기한다. 개학 직전이고, 공식적으로는 장마가 끝났지만 계속 비가 온다. 태풍의 계절이다. 나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행상의 목소리에 잠을 깬다.”(83쪽)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6개월 뒤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시골 마을 양철공 백인가정에 입양됐다가 2006년 서울에 정착한 제인 정 트렌카(41). 그의 짧은 약사(略史)로 시작되는 장편 ‘덧없는 환영들’(창비)의 언어는 영어이다. 영어로 쓰고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는 현실이 제인 정의 딜레마이다. 하지만 이 딜레마는 애초에 그의 몫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어야 했다.
“한국 엄마가 한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고유명사: Jane, 미국 엄마가 한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고유명사: 경아”(72쪽)라는 문장이 말해주듯 소설은 입양이 가져온 근원적 상처,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를 혼란스럽게 오가는 낯선 귀환의 기록이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장소를 동시에 넘나드는 통시적 기억이다.
“장마는 내 꿈속으로 너울져 들어와 나의 밤들에 비를 뿌리고 홍수를 일으킨다. 전 남편, 전 부모, 무너진 관계, 잃어버린 연결, 이제는 내가 살지 않는 장소들의 꿈. 내가 살던 집은 알맹이 없이 예전 모습의 잔해로, 흔적 같은 것으로 밀밭 한가운데를 떠다닌다.”(17쪽)
두 언어 경계를 넘나들며 두 세계를 살았던 과거의 기억은 지워지는 게 아니다. 그냥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건 극복 대상이 아니라 통렬하게 되짚어내야 하는 생생한 현재이기도 하다. 두 개의 교차하는 과거는 ‘나’를 미묘한 파동으로 인도한다.
“…내 머리카락 같다. 그 검은 머리카락들은 바닥에 괄호와 방백을 새겨넣는다. 음파 같다. 칠흑 같은 침묵에 맞서 언쟁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리는 무늬다. 그 파동들은 심장 박동처럼 오르락내리락 스크린을 가로지르며 공간을 재구축한다.”(21쪽)
미국 옥스버그 칼리지에서 피아노와 영문학을 전공한 트렌카는 문체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제목 ‘덧없는 환영들’은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22의 표제이기도 하다. 스무 개의 짧은 피아노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일부만 연주하거나 순서를 바꿔 연주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모두 9장 21개 소제목으로 짜여진 소설 역시 어느 부분부터 읽어도 상관없는 관절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두 문화 사이를 오간 입양인의 복잡하고도 혼돈스러운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2007년 설립된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의 사무총장이기도 한 트렌카는 ‘작가의 말’에 썼다. “나는 우리의 ‘부재’가 아닌 우리의 ‘존재’가 이 나라 현대사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 이일수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