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50) 말을 가지고 노는 이브의 반란… 시인 이제니 (끝)

입력 2013-02-14 17:24


언어의 또다른 틈새서 울리는 리듬

꿈틀대는 듯한 문자의 친연성 표출


부산에서 태어나 거제도에서 성장한 이제니(41·사진)에겐 쌍둥이 언니 에니와의 추억이 깊게 새겨져 있다. 수업을 마친 귀갓길에 언니와 손을 붙잡은 채 “이 다음에 크면 너는 그림을, 나는 글을 써보자’고 말한 건 초등학교 시절이다. 이제 에니는 화가가, 제니는 시인이 됐다. 흔히 이제니 시의 출발점을 말할 때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페루’를 언급한다. ‘페루’엔 국적을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이 있고, 언젠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고향이 들어와 있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페루’ 부분)

페루는 어디에 있는가. 그에 따르면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이런 인식은 대학 졸업 15년 만에 등단했을 만큼 긴 습작 기간에 빚어졌다.

“어느 순간 어떤 낱말도 어떤 문장도 그 의미 그대로 읽히지 않는 시기가 있었어요. 백지 위의 문자가 무슨 벌레처럼 느껴지면서…. 심리적 상황에서 비롯됐겠지만 신체적으로도 증상이 오더라고요. 책을 읽으려고 하면 현기증이 심해서 읽을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한동안 읽지도 쓰지도 못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모든 문장들이 의미 차원에서 읽히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 하나의 리듬으로 읽히게 되는 그런….”

그 경험이 지금의 이제니를 낳았다. 언어의 또 다른 틈새를 발견한 것 같았고, 글이라는 것이, 시라는 것이, 의미 너머의 어떤 것, 문자로 된 리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 시절 록 밴드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치며 다른 대학 축제 때 공연을 하러 다니곤 했으니 ‘리듬’하면 이제니를 빼놓을 수 없다. 시를 쓸 때도 문자로 된 리듬을 즐긴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거제 앞바다에 대한 생래적 감각에서 발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보고 자라서인지,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대한 감정의 지문이나 어떤 생래적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수평선, 무한함, 물결의 반복이라든가, 그런 풍경들을 매일 보고 자라다 보니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구체적인 자연의 풍광이기 이전에 세계에 대한 거대한 상징 그 자체로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2010)는 4쇄를 찍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감자와 샐러드 완두와 완두콩// 당신은 감자 샐러드를 먹는다/ 완두를 골라내면서// 완두는 싫다 싫어요/ 완두는 완두 완두하고 울기 때문에// 나는 감자 샐러드를 먹는다/ 당신이 골라낸 완두콩만 골라서// 완두는 완고하지 않아요/ 완고한 것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완고 완고하게 우는 당신의 마음 속에”(‘완고한 완두콩’ 부분)

그는 “감각적으로 유사한 단어들이 서로의 곁에 있는 걸 보는 것이 즐겁다”라고 말한다. 의미상으론 거리가 멀지만 시각적·청각적으로 유사한 낱말들을 한자리로 불러들임으로써 의외의 친연성을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그 리듬을 통해 그 너머의 의미까지 발생하게 되는 문자들끼리의 교감을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은 쌍둥이 언니와 둘이서 느끼던 특별한 텔레파시나 정신적 감흥에서 비롯됐을 법도 하다.

첫 시집을 낸 뒤 서울 홍익대 앞 카페에서 ‘더블플레이 포임(Double Play Poem)’이라는 부정기 시낭송회를 열었던 그는 요즘 그 녹음들을 다듬어 홈레코딩 방식으로 앨범을 낼 계획이다. 언니와 함께 산문집도 준비 중이며, 텍스트 실험 동인 ‘루’와 전시·공연·낭독도 함께 할 예정이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