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퍼주기와 안주기
입력 2013-02-14 17:39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그렇게 많이 퍼주기를 했음에도 북한이 첫 번째 핵실험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4일 TV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퍼주기’는 햇볕정책의 다른 말이다.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식량·비료를 과감히 지원하고 나서자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그렇게 불렀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이회창 총재부터 즐겨 사용하면서 하나의 용어가 됐다. 지금은 복지정책을 비판할 때도 “세금 퍼주기”라 할 만큼 쓰임새가 넓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북 지원을 퍼주기가 아닌 ‘퍼오기’라고 반박했다. “흥부가 제비 다리 고쳐주니 보물 쏟아지는 박씨를 물어왔듯이 지금의 북한 돌보기는 우리 민족에게 대운을 가져올 것이다. 되로 퍼주고 말로 퍼올 것이 분명하다.” 그냥 퍼주는 것처럼 보여도 이를 통해 북한의 인적자원, 천연자원을 활용하고 ‘철의 실크로드’를 구축한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라는 주장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끝나갈 무렵, 북한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시인했다. 영변 핵시설의 봉인을 제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도 다시 탈퇴했다. 햇볕정책을 비판하던 쪽은 훌륭한 명분을 손에 쥐었다. “거봐라. 무작정 퍼줬더니 그 돈으로 핵을 개발했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는 포용을 계속했다.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으로 북핵 문제가 해결되나 싶더니 북한은 이듬해 1차 핵실험을 해버렸고 비판론자들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거봐라. 무작정 퍼주니….”
이어서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안주기’를 택했다. 정말 하나도 안줬다. ‘비핵·개방·3000’이란 정책은 “북한 주민의 소득이 3000달러가 되게 해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먼저 핵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당근을 주면서 핵 포기를 유도하다 핵을 포기해야 당근을 주기로 180도 바뀌었다. 채찍도 들었다. 5·24 조치로 대북 경협과 지원을 전면 중단했고 국제사회를 통한 제재는 다 헤아리기 어렵다.
그 결과물이 장거리 로켓(미사일)과 3차 핵실험이다. 북한은 현 정부 2년차인 2009년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2차 핵실험을 했다. 유엔 안보리가 제재에 나서자 3년 만인 지난해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했고 사흘 전 HEU로 추정되는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명박 정부가 하나도 안주는 동안 북한은 핵보유국에 성큼 다가서버렸다.
이 정부의 고위 인사는 “그래도 북한의 못된 버릇은 고쳤다”고 말했다. “북한은 퍼주는 데 너무 길들어 있었다. 회담을 제안하면 얼마 줄 건지부터 물었다. 장관급 회담은 얼마, 군사회담은 얼마 하는 식이다. 적어도 그런 버릇은 고쳤다.” 그렇게 버릇 고치는 사이 북한은 핵무기를 거의 손에 넣었고, 지금 야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봐라. 퍼준다고 뭐라 하더니 안주니까 진짜 핵무기 만들었다!”
우리는 북한을 상대로 ‘퍼주기’ 10년과 ‘안주기’ 5년을 했다. 두 정책 모두 북한의 핵 욕망을 꺾지 못했다. 난감한 노릇이다. 천신만고 끝에 개발한 핵을 이제 와 선뜻 버리려 하겠는가. 퍼줘 가며 달래거나 안줘 가며 윽박지를 수준을 넘어섰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마침 곧 새 정부가 출범한다. 북한을 잘 아는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겠다고 나설 여건을 조성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려면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고 북한 내부에서 변화의 기운이 싹터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한 방법을 새 정부는 찾아야 한다. 핵을 가진 북한을 잘 ‘관리’하면서.
태원준 정치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