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홍윤희씨, 20년간 홀로 무죄 증거 추적… 63년 만에 간첩 누명 벗어
입력 2013-02-13 19:01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또랑또랑한 정신을 유지하는 이유는 ‘명예회복’을 위한 집념 때문입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9월 총공격’을 국군에 제보했다가 오히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홍윤희(83)씨가 63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판사 이원범)는 13일 아군과 교전을 벌인 혐의(국방경비법 위반)로 1950년 9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던 홍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전쟁의 실상과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홍씨는 무죄선고 전인 11일 밤 국민일보 기자와 만나 그동안의 소회를 털어놨다.
1950년 당시 국군 보병학교 입교를 위해 육군 감찰관실에서 대기하던 홍씨에게 전쟁은 날벼락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전쟁이 난 줄도 몰랐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강 다리는 이미 끊어져 있고, 서울은 인민군 세상이 돼 있더라.” 6월 28일 졸지에 ‘낙오한 국군’이 된 홍씨는 고향친구를 찾아갔다.
다락방을 홍씨에게 내준 공산당원 친구는 자수를 권유했다. 홍씨가 “자수하면 국군이었던 나를 살려둘 것 같으냐”고 반문하자 친구는 “의용군으로 들어가라. 전투 중 국군으로 다시 넘어갈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친구의 형은 홍씨가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벽초(碧初) 홍명희 선생의 친척이라는 내용의 추천서를 써줬다. 홍씨는 7월 10일 의용군에 들어갔다. 관희라는 친척의 이름을 썼다.
홍씨는 8월 24일 인민군 1사단 직할의 위생반으로 편입됐고, 그곳에서 ‘9월 총공격’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9월 1일 0시를 기해 전장 서쪽에 위치한 인민군 제1군이 먼저 진격하고 48시간 후 북쪽에 있는 인민군 제2군이 총공세를 펼친다’는 내용이었다. 8월 31일 밤 홍씨는 부대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새벽 산기슭에서 국군 병사를 만난 홍씨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인계돼 1차 심문을 받았고, 유엔군 사령부의 2차 심문도 4∼5시간 동안 받았다. 그는 “9월 총공격 작전부터 경북 지역의 주력부대 배치상황 등을 자세히 브리핑했다”고 말했다. 실제 인민군은 9월 1일 총공격을 감행했고,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9월 11일 홍씨는 느닷없이 헌병에 체포됐다. 간첩혐의였다. 혹독한 고문이 뒤따랐다. 군법회의는 홍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몇 차례 감형으로 5년간 옥살이를 한 홍씨는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후 홍씨는 미국 버클리대 스포츠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했다. 90년대 중반 어느 날 도서관을 찾은 홍씨는 문득 ‘인민군이 총공격을 안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어. 분명 총공격은 있었는데, 전쟁 중 귀순한 김성준 인민군 소좌가 제보한 것으로 기록돼 있더라고.” 홍씨는 간첩이라는 멍에를 벗기 위해 국내 법무처와 미국 국방성의 기록 등을 샅샅이 뒤졌다. 결국 2011년, 6·25 전쟁사의 최고 권위자인 로이 애플먼의 ‘홍의 정보(The Hong’s information)’라는 메모를 찾아냈다. 애플먼의 메모는 홍씨가 ‘9월 총공격’ 제보를 했다고 적시하고 있었다. 홍씨의 재심신청을 받은 법원은 “홍씨의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며 지난해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홍씨는 무죄 선고 직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무죄를 받게 돼 감개무량하다”며 소리 내어 울었다. 홍씨는 오는 4월 미국으로 돌아간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