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9개의 이름을 가진 트레일

입력 2013-02-13 22:20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 화면을 몇 번만 두드리면 손쉽게 길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인터넷으로 주소를 입력하면 실제 거리풍경이 컴퓨터 화면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화면을 몇 번만 클릭하면 지구 반대편 나라의 뒷골목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북한 평양의 거리와 건물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도 서비스되고 있다. 길을 떠날 때마다 두툼한 지도책과 도로표지판을 일일이 비교하며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요즘 길 찾기가 얽힌 실타래 풀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제주올레길의 성공을 계기로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트레일을 조성하면서 표지판과 지도 등 안내체계를 충분히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점과 종점이 불명확하고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애매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풍경이 아름답지도 않고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스며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왜 트레일을 조성했는지 의아한 경우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길은 하나인데 이름은 9개나 되는 황당한 사례도 있다. 얼마 전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를 찾았다. 송지호에서 화진포에 이르는 구간은 경치가 아름다워 고성군이 조성한 ‘관동팔경 800리 길’의 주요 구간이다. 하지만 부처와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트레일을 조성하면서 국토해양부는 ‘관동팔경 녹색경관길’과 ‘해안누리길’, 행정안전부는 ‘평화누리길’, 문화체육관광부는 ‘해파랑길’로 부른다. 강원도는 ‘낭만가도’와 ‘산소길’로 작명했고, 고성군은 ‘고성갈래구경길’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붙였다. 이 길의 본래 이름이 7번 국도이니 길 이름이 9개나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비슷비슷한 이름에 시점과 종점이 다른 그 길을 한 장의 관광지도에 표시하는 것은 더 어려워 트레커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현재 부처별로 조성했거나 조성하고 있는 트레일은 문화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를 비롯해 국토부의 ‘해안누리길’과 ‘녹색경관길’, 행안부의 ‘우리마을 녹색길’, 환경부의 ‘국가생태탐방로’, 산림청의 ‘산림문화체험숲길’ 등이다. 여기에 강원도의 ‘산소길’과 경기도의 ‘평화누리길’ 등 광역자치단체의 트레일과 시·군·구에서 조성한 트레일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트레일도 속속 탄생하고 있다. 자고 나면 길이 하나씩 생기다보니 트레일이 지나가는 지자체조차 헷갈려하기 일쑤다.

국민들의 건전한 여가와 건강을 위해 트레일이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던 길을 천천히 걷다보면 국토에 대한 애정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도보여행은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여행객이 늘어나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정부 부처와 지자체, 그리고 민간단체들이 경쟁적으로 트레일을 조성하는 이유다.

문제는 트레일이 면밀한 검토 없이 지도에 줄긋기 식으로 조성되는 데 있다. 부처마다 트레일을 독자적으로 조성하다보니 예산낭비에 중복구간도 속출하고 있다. 먼저 깃발을 꽂고 보자는 식으로 경쟁하다보니 안내판이 없거나 부실한 경우도 허다하다. 사후 관리가 안 돼 폭풍우에 유실돼 방치되는 구간도 많다. 그런데도 정부 부처와 지자체들은 영토싸움이라도 하듯 트레일 조성에 혈안이다.

트레일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돼야 한다. 문화부가 조성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가 모범사례다. 명품 트레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부처와 지자체가 나홀로 추진하기보다 콘텐츠가 풍부한 문화부 주도로 협의체를 구성해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이 있다. 트레일도 너무 많으면 공해와 다름없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