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16·끝) ‘휠체어 지휘자’로 우뚝… 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
입력 2013-02-13 17:29
방바닥에서 뒹굴며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내가 휠체어를 날개처럼 달고 미국으로 건너가 교수가 됐고 많은 사람 앞에서 지휘하고 강의를 한다. 이 모든 영광을 나는 하나님께 돌린다. 앞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이런 주님의 은총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뜻하지 않은 순간 나누고 봉사하는 삶으로 나를 이끌어주셨다. 결정적인 계기는 한 통의 이메일이었다. 이 편지는 나의 삶을 담은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이라는 책을 본 독자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했다. “베이징에서 의료선교를 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교수님이 계셨던 재활원과 아주 비슷한 어려움에 놓인 재활원을 현지에서 봤습니다. 교수님께서 그곳에 한 번 가셔서 불편한 몸과 가난 때문에 꿈을 잃을지도 모를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나눠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주저 없이 꼭 가보겠다고 답장했다. “모든 경비는 교수님이 부담하셔야 합니다”란 답을 받고 잠시 멈칫했다. 교수가 된 뒤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나는 여전히 집세에다 아이들 교육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평범한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컴했던 어린시절 한줄기 빛이 돼 주신 고마운 분들이 떠올라 방문 계획을 미루지 않았다.
현지에서 40여명의 장애아동들을 만난 뒤 울컥했다.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곳은 내가 머물던 성세재활원과 정말 비슷한 환경이었다. 특히 재활원 한 구석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한 어린이를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그곳에서 나는 연주회를 열었고 어린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나눠줬다. 어린이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재활원 시절 나는 그토록 달콤한 군것질거리들을 마음껏 먹고 싶었다.
이후 더욱 열정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다. 방학을 앞두고 선교지에서의 봉사활동,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 일정 등을 잡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유럽 등지의 교회에서 내게 과분한 축복을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스케줄도 틈틈이 소화했다. 가장 보람된 일은 “우연히 교회를 들렀다가 교수님의 간증과 연주를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일도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장애가 있는 가난한 학생인데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종종 받고 가슴 한구석이 찡했지만 어떻게 도울지 막막하던 때 우편물 하나를 받았다. 보내는 사람은 ‘찰리 할머니’라고만 씌어 있었고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체크카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큰돈은 아니지만 어려운 학생을 위해 써주시기 바랍니다”였다. 편지를 받고 난 뒤 장학금을 마련하는 일을 조만간 구체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부자들만 장학재단을 만들 수 있다고 여겼는데 작은 도움의 손길을 모으면 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외국의 선교지에 세워진 한 음악학교에 갔을 때도 작은 도움으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절감했다. 이 학교의 장애인 학생 한 명을 돕는 데 한 달에 50달러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재활원의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내가 꿈을 키웠고 여러 천사 같은 분들의 따뜻한 도움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놀라운 일들…. 내 비전은 더 많은 장애아동들이 나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꿈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