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15) 83대1 경쟁 뚫고 라이트주립대 교수에 최종합격

입력 2013-02-12 17:40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교의 교수 채용 경쟁률은 83대 1이었다. 보통 수백대 1까지 기록하는 다른 대학의 경쟁률보다는 낮은 편이었다. 세 분야를 모두 공부한 교수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유리한 조건의 경쟁자들은 많았다.

1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뒤 교수채용위원회 위원장과의 전화 인터뷰로 진행된 2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머리가 뻣뻣해질 정도의 긴장감으로 나는 다음 시험을 준비하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3차 시험은 ‘심층 전화 면접’이었다. 심사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전화를 해 인터뷰하는 방식이다. 심사위원들은 내 말을 스피커로 동시에 듣고 여러 질문을 했다. 나는 30분간 진행된 영어 인터뷰에서 내 실력 이상을 발휘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도 없었고 의외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또박또박 답했다.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을 것이다.

나는 최종 후보 3명 안에 들었고 3박4일간 대학에서 진행된 최종시험을 치르게 됐다. 주어진 과제는 독주회, 오케스트라 리허설,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개인 레슨 등이었다. 또 총장,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 학생과 함께 모임을 갖고 내 됨됨이를 평가받는 시간도 있었다. 시험이 끝난 뒤 녹초가 됐다. 이제 기도하는 시간만 남았다.

“축하합니다. 우리 대학의 교수로 최종 결정됐음을 알려드립니다.”

목이 메었다. 원서 접수부터 최종 발표까지 7개월이 걸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바이올린을 배운 뒤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느라 음악과 멀어졌던 시절, 대전의 연탄광에서 연습에만 몰두했던 날들, 낯선 미국 땅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생했던 시간들…. ‘하나님께선 나에게 이처럼 큰 열매를 맺어주시기 위해 그토록 힘든 시간을 주셨구나.’

교수가 된 뒤 대학에서 처음으로 연 독주회에는 관객들이 몰려들어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나서야 연주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유럽 아시아 등 세계 연주회 일정도 많아졌고, 미국 전역의 교회에서 간증뿐 아니라 연주회를 해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또 베데스다 4중주단과 다시 만나 장애인을 위한 연주회도 열었다. 나를 불러주는 곳이라면 크든 작든 연주회 규모에 연연하지 않고 응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만큼 이를 나누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 덕분에 나는 음악과 교수들 중에서 음악활동 실적이 가장 높았다. 대학 재학생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대학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미국의 한 대형교회에서 간증과 연주회 초청이 있었는데 이 실황이 전파를 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대학 측에서도 학교의 이미지를 개선했다면서 나의 외부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조교수로 부임한 지 7년째 되던 해에 나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라이트주립대의 종신교수에 임명됐다.

지휘자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담스런 자리다. 단원들뿐 아니라 수많은 관객들의 시선이 지휘자에게 꽂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지휘자와 달리 휠체어에 앉아서 단원들의 소리 하나 하나를 조화롭게 이끌어야 한다. 특히 대학 오케스트라에 애착이 간다. 여기에는 교수이자 첼로 연주자도 있었고 일반인들 대다수도 음악 전공자들이었다. 되도록 쉬운 곡보다는 어려운 곡을 택해 연습했다. 단원들의 실력을 믿었을 뿐 아니라 도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족한 지휘자인 나를 10여년간 전적으로 믿고 따라준 단원들에게 감사했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