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아베 총리의 자기표절

입력 2013-02-12 17:40


“평화헌법 폐기, 침략의 역사 외면이 아름답고 새로운 것이라는 주장 되풀이 하다니”

며칠 전 일본에서 책 한 권이 배달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경제정책에서 외교·안보에 이르기까지의 정책구상집 ‘새로운 나라로’를 최근 출간했다기에 주문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생애 두 번째로 총리에 취임한 아베는 첫 총리 취임을 앞둔 2006년 7월에도 정책구상을 담은 책 ‘아름다운 나라로’를 펴냈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책구상은 총리 취임 1년 만인 2007년 9월, 그해 7월의 참의원선거 참패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자진 퇴임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로 다시 떠올랐다. 쫓겨나듯 총리에서 물러났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고 건강에도 자신이 있어 보였다. 정권 탈환을 외치는 그의 행보에는 힘이 넘쳤다. 그가 새로 내놓았다는 정책구상집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나라로’를 펼쳐보곤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나라로의 완전판(完全版)’이라는 부제가 무색했다. 6년 전 내놓은 ‘아름다운 나라로’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맨 앞에 세 쪽짜리 ‘서문-새로운 나라로 간행에 부쳐’와 끝자락에 18쪽 분량의 ‘증보 최종장(最終章) 새로운 나라로’가 추가돼 있을 뿐이다.

18쪽짜리 문서 ‘새로운 나라로’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도 되는 걸까. ‘아름다운 나라로’가 이로써 완전해졌다는 책 표지날개의 선전문구는 황당 그 자체다. 독자를 우롱하는 아베 총리의 자기표절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이 문서는 월간지 ‘분게슌주(文藝春秋)’ 올 1월호에 게재됐었다.

총리로 다시 등장한 아베를 앞세워 출판 불황기에 한몫 잡아보자는 출판사 분게슌주의 얄팍한 상업논리가 작동됐던 것일까. 실제로 ‘아름다운 나라로’는 당시 첫 전후 세대 총리로 등극하는 아베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30만부 이상 팔렸으니 출판사의 상혼이 개입됐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 허락 없이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일반인도 아니고 일국의 총리임을 감안한다면 출판사보다 저자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아베의 주장은 지난 5∼6년 동안 발전은 고사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일까.

‘아름다운 나라로’의 서문에서 그는 “일본을 위해 싸우는 정치가이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조국은 말뿐이고 자기만을 위해 싸우는 정치가 만연된 요즘 그의 주장이 신선미를 주는 측면도 있으나 우려되는 문제는 한둘이 아니다.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조국을 위한 것이냐, 아니 주변국과의 관계는 무시하고 그저 내 조국만을 위하면 된다는 것이냐 등 의문이 꼬리를 문다.

더구나 그가 오매불망 강조하는 ‘아름다운 나라’란 패전 이전의 일본이다. 여기에는 전쟁에 대한 책임, 침략에 대한 반성 등은 처음부터 철저히 배제돼 있다. 고집 센 애국심 함양만을 강조하는 그의 ‘아름다운 나라로’는 ‘새로운 나라로’란 말로 재포장됐지만 내용인즉슨 결국 전전, 즉 힘으로 모든 것을 추구하고 ‘대일본 만만세’를 외치는 세계로 돌아가자고 부추기는 억지 복고주의에 다름 아니다.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과거 침략의 역사를 모른 체하겠다는 태도가 아름답고 새로운 것이라는 주장은 궤변일 뿐이다. 이번에 새로 추가된 경제활성화 대책, 즉 대대적인 금융완화를 통한 엔저 유도는 일본이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 국제 교역질서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엔화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평가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엔저 유도는 주변국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 도박과도 같다.

총리에서 밀려나 5년을 와신상담하며 갈고닦았다는 그의 정책구상이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라니 씁쓸하다. 동아시아의 21세기 의제는 침략·전쟁으로 점철된 지난 세기와 구별되는 협력·공존에 둬야 할 텐데 참 아쉽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