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르완다 김보혜 선교사] (2) 아프리카의 희망, 어린이

입력 2013-02-11 18:28


학교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어린이 기적같은 1등

흔히들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 지칭한다. 19세기 경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다며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부르게 됐다지만 ‘검은’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부정적 인상에 늘 거부감이 든다.

비록 작은 나라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뭔가 대체할 단어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단어가 ‘젊은 대륙’이다. 끊임없는 내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또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곳이기에 평균 연령으로는 아프리카가 가장 젊은 대륙이 아닐까 생각한다. ‘젊은’이 주는 희망적인 인상도 좋으니 나는 젊은 대륙으로 생각하고 있다.

르완다에는 어린아이들이 참 많다. 전쟁을 겪은 발전도상국에 흔한 현상이기는 하겠지만 너무 많아서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여러 모로 소외되기가 쉽다. 처음에 르완다에 와서는 내게 맡겨진 신학교 사역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길에 나가면 이제 겨우 걸음을 걷는 듯한 어린아이가 제 몸만한 노란 물통을 들고, 맨발에 코를 흘리며 물을 길러 다녔다.

가끔은 무지막지한 어른들의 손에 맞아가면서 울지도 않는 아이들을 그저 보기만 하고 지나치는 게 견디기 힘들어서 어린이 교회를 시작하게 됐다. 내 어린 시절의 교회를 추억하면, 성경 외우고, 열심히 출석하면 일단 학용품 걱정이 없는 풍성함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절기가 되면 맡겨진 일들을 열심히 준비하면서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예수님의 사랑 안에 매여 살게 됐다. 그게 오늘 내가 르완다에서 살아가게 된 이유가 된 듯도 하다. 당시의 내가 자란 교회는 미국 선교사들의 후원이 있었는데, 이제 이 땅에서 그 사랑의 빚을 조금씩 갚아 간다는 생각이 드니 감회가 남다르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 교회에 대한 좋은 추억처럼 이곳 아이들도 ‘교회에 와서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그냥 즐겁고, 행복했다’는 기억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그 기대감으로 복음과 빵(진짜 빵)을 들고 2007년에 처음으로 어린이교회를 시작했다.

책 상자를 얼기설기 엮어서 바닥에 깔개를 만들고, 풍선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그냥 풍선 따라 들어온 아이들일지라도 그 아이들이 금방 터져버리는 풍선만이 아니라 그 무엇에도 터지지 않는 사랑으로 자신을 주신 예수님이 가슴으로, 몸으로, 삶에 실감되기를 소망하며 시작했다. 뭘 해도 늘 눈에 띄는 외국인인지라 광고도 하지 않고 시작했는데도 첫날 30여명이 모였다. 오후 2시 예배인데도 오전 9시부터 찾아왔다.

아이들이 많아야 100명 안팎이었을 작은 마을이었는데 3개월 만에 300여명의 아이들이 몰려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어린이교회 사역을 접으며,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아이들 마음속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지방의 교회를 방문하게 됐다. 방문하는 교회마다 아이들을 위한 선물 꾸러미가 쌓였다.

2007년 6월, 식용유와 설탕 등 생필품 봉투를 들고 키니냐 교회의 에이즈 가정 구제를 위해 집집마다 방문하던 날이었다. 허리를 잔뜩 구부린 젊은 여인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지탱하고 길에 서 있었다. 차를 기다린다는데 그 근처는 자전거택시조차도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몹시 힘든 표정이어서 내가 타고 있던 택시에 태워 얼른 보건소에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이즈와 말라리아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1년 8개월 된 아버지 없는 아들 하나를 남겼다. 며칠 후 집에 찾아가 보니 외할머니가 아이를 안고는 있는데, 시력이 약한 데다 청각 장애도 있어 제대로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 엄마의 친구가 아이를 돌보겠다 해서 내 친구 하나와 내가 양육비를 지원해 왔는데, 건강하게 잘 자라서 이제는 앞니 빠진 초등학교 2학년생이 됐다.

2008년 처음으로 염소 분양을 하던 날이었다. 키니냐교회 인근에 사는 학살사건 생존자와 고아들에게 염소를 나눠주는데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무척 작은 몸집이었지만 날쌔게 염소 몰이를 하길래 여유로 더 산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주고 키우라고 하려고 불렀다.

만 10살이었는데 “학교를 너무너무 다니고 싶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아직 안 들어 준다”고 했다, 그 아이에게 ‘1,2,3,4’와 ‘a,b,c,d’ 네 글자를 가르치다 답답해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 ‘세상에 몰라도 그렇게 모를까’ 그랬던 그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나니 4년 동안 매 학기마다 1등 한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내게 보여준다. 놀라운 일이다.

세상에서 키가 제일 작다고 알려진 피그미 족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데 카나지라는 지역에 집중해서 격월로 옥수수 가루와 콩을 지원하게 됐다. 항상 아이들이 몰려오니 성경 암송을 시켜서 학용품을 나눠주곤 했는데, 그 지역에 교회를 시작하기 전이어서인지 아이들이 성경 암송을 어려워했다. 그 중 눈빛을 반짝이며 또릿하게 암송을 잘 하는 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 아이는 피그미 족이 아니었는데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면서 할머니에게 맡겨졌다가 워낙 가난하다보니 피그미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2010년 정부에선 피그미들의 흙으로 된 움막집을 모두 다 함석집으로 개선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NGO를 통해서 주택개선을 했다. 그런데 피그미들에게만 집을 후원하니 이 아이의 집은 더 허름해져 버렸다. 다행히 마침 나를 찾아 르완다를 방문했던 친구의 조카가 후원을 하게 돼서 비록 흙집이지만 이 아이도 새 집을 갖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이 말씀을 읽으면 생각나는 퀴제라라는 아이도 있다. 지방에 아들만 8명을 둔 목회자가 있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부지를 구입하느라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점심을 먹느라 그의 집에 들렀을 때 한 아이가 뇌성마비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환경으로 볼 때에는 참 한숨만 나오는 그 어두운 곳에서도 웃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운 사모를 닮아서인지, 뜻 모를 괴성을 지르면서도 웃기만 했다.

아이는 어두컴컴한 흙집 안에서 먹을 것을 발견했을 때는 비호처럼 빨랐다.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다가 그 아이가 제대로 힘 조절을 못하는 바람에 나는 몇 번이나 얼굴을 맞았다. 몇 해 전 선교보고를 할 때 그 아이 사진을 본 한 목사님은 아이가 혹시 소외될까 걱정된다고 비싼 축구공을 선물하시면서 함께 매월 후원을 하고 있다. 덕분에 10명이나 되는 그 아이 가족의 생활이 윤택해져서, 벽에 시멘트도 바르고, 전기도 놓게 됐다. 그 아이가 가진 장애 때문에 가족에게 걱정거리요, 부담으로 여겨졌을 아이가 이제는 가족 전체를 부양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 셈이다.

김보혜 르완다 페파교단 협력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