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2부) 5년, 새 정부의 과제] 갱도속 폭염·탄가루… “전쟁터 가는 심정”

입력 2013-02-11 17:42


⑧ 파독 광부·간호사 50년

최의택(65)씨는 독일에서 광부로 20년을 일했다. 최씨는 과거를 회상하며 “안 죽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광산 일이 험하다 보니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한국 광부 중에 다쳐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사고로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얼굴을 알고 지내던 한국 광부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날은 그렇게 갱도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머나먼 타지에서, 그것도 지하 갱도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토로했다.

◇독일 광산으로 전해진 부모님들의 임종 소식

파독 초기 독일이 선진국이라 광산도 안전할 것이라고 여긴 광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계화된 독일 광산이 한국보다 더 위험한 요소를 안고 있었다. 각종 기계나 장비로 인한 사고가 잦았기 때문이다.

지하 1000∼1500m의 갱도는 사시사철 섭씨 35도의 열기를 내뿜었다. 먼지가 가득해 앞을 보기도 힘들었다. 작업도구도 인간의 인내를 시험했다. 갱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는 작업도구는 50㎏이 더 나갔다.

최씨는 “그런 악조건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 가족들이 어머니가 자궁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지금처럼 한국과 독일 사이의 왕래가 편할 때도 아니고, 광산에 휴가를 낼 수도 없어서 그저 어머니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며 일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임종을 못 본 불효자가 됐다고 생각하니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면서 아픈 기억을 꺼냈다.

◇가난이 싫어 독일행…언어장벽에 눈치로 광산 일을 배워

지난해 12월 독일 에센의 한인문화회관 내 파독광부기념회관에서 만난 파독 광부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최광섭(63)씨는 1977년 6월 독일에 도착한 뒤 오버하우젠 광산 등에서 7년간 광부로 일했다. 석탄 캐던 인부였던 그는 탄광 일을 익혀 지하 갱도를 오가는 디젤 기차 운전을 오래했다. 최씨도 아버지 임종 소식을 1979년 독일 광산에서 들었고, 오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최씨는 “가난이 싫어 독일에 왔다. 당시 광산에는 독일 사람들 말고도 이탈리아, 구소련, 구유고슬라비아, 터키, 일본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에게 웃으면서 무슨 말을 하곤 했다. 독일어를 배운 뒤 그게 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너무 화가 나서 몸싸움 직전까지 간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최씨는 “독일어를 모르는 한국 광부들은 눈치로 일을 배워야 했다. 초기 독일 광산에 왔을 때는 언어장벽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작은 체구의 성규환(73)씨는 독일에 거주하는 파독 광부들의 모임인 재독한인 글뤽아우프회 회장을 맡았다가 지금은 고문으로 있다.

그 역시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가 망해 먹고살기 위해 37살이던 1977년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성씨는 “독일이나 유럽 출신 광부들은 덩치도 좋았다. 나는 체격도 작은 데다 나이도 많아 애를 많이 먹었다. 낯선 음식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정말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매일 광산에 출근했다. 탄광에서 굴 파는 작업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두 달간 입원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에 뿌듯…반짝 관심으로 그칠까 걱정도

그는 첫 월급 800마르크를 받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성씨는 “정말 큰 돈이었다. 당시 한국 공무원들의 10배 넘는 월급이라고들 했다. 한국 광부들은 가족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국제전화도 안 하고, 먹을 것도 참아가며 모은 돈을 국내로 거의 다 송금했다”고 기억했다.

성씨는 “솔직히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파독 광부들이 힘들게 번 돈이 한국 경제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들을 때는 뿌듯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광부들도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최광섭씨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든 걸 참아냈다. 낯선 독일에서 내가 잘못하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더 조심하고, 더 열심히 일했다”면서 “파독 광부들이 한국 경제성장의 밑거름이라는 평가를 들을 때면 ‘우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찬사 뒤에 숨어 있는 고민도 내비쳤다.

성씨는 “가장 어린 파독 광부가 50대 후반이고, 다들 60대 이상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들이 다 죽으면 파독 광부의 역사도 그냥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올해가 파독 광부 50주년이라 한국 내에서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한때의 반짝 관심으로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힘들게 지내는 파독 광부들에 더 많은 관심을

독일에 남아 있는 파독 광부 대부분은 연금 생활자다. 그런데 연금 수령액이 적어 힘들게 사는 이들이 많다. 광부들이 20대 후반, 30대 초·중반에 독일로 왔고 일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근무연수에 비례해 연금을 주는 독일에서 적은 연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970년 33살 때 독일에 온 권덕기(76)씨는 “파독 광부들이 적게는 500유로(74만원), 많게는 800유로(118만원)를 연금으로 받는다. 이 돈으로는 그저 밥만 먹고 지낼 뿐이다. 생활이 힘들다 보니 모임에 안 나오고 그러다 보니 연락이 끊긴 동료들도 많다”고 전했다.

파독 광부들이 일했던 1960∼70년대는 원화 대비 마르크화가 매우 높게 평가됐기 때문에 광부들이 번 돈으로 쉽게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최광섭씨는 “조국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 가진 돈으로는 한국에서 집 구하기도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다른 광부는 “우리가 보낸 돈으로 사촌조카들까지 공부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가족들이 그 고마움을 잊은 것 같다”고 토로했다.

에센=하윤해 기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