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당시 광부파견 어떻게… 14년간 7936명 고임금에 대졸자도 몰려

입력 2013-02-11 17:41

1963년 12월 16일 한국과 당시 서독 정부는 ‘한국 광부의 독일 광산 임시 취업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이 광부들의 파독에 모태가 됐다.

광부 파독은 한국과 서독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광산에서 일할 광부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79달러에 불과한 빈국이었다.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못 미쳤다.

서독 정부는 한국에 광부 파견 의사를 타진했다. 외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실업률이 28%에 달했던 한국으로선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서독은 한국과의 협상에서 ‘임시 취업’임을 강조했다. 독일에선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외국 노동자들로 인해 불법 이민이 이미 사회문제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광부들의 근무기간은 3년으로 제한됐다.

독일 여성과 결혼했거나 광산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통역이나 사무원으로 승격된 사람들은 더 일할 수 있었다. 또 1970년대 중반부터는 3년 제한 규정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아 더 일하기를 희망한 한국인 광부들은 큰 제약 없이 근무할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독일과 협상을 진행하던 1963년 8월 인력 모집에 나섰다. 4만6000여명이 몰려들었고 30% 이상이 대학 졸업자, 대학 중퇴자 등 고학력자들이었다.

광부 파독은 1963년 12월 21일부터 1977년 10월 25일까지 14년 동안 진행됐다. 모두 7936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검은 금광’으로 불리던 독일 광산에서 일했다.

파독 광부들은 20㎏이 넘는 착암기를 들고 지하 막장에서 고된 노동을 했다. 유럽인들에 비해 왜소한 체격이라 광산 근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언어와 음식도 큰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한국 광부들은 특유의 근면성으로 시간 외 근무까지 자청했다. 당시 서독은 주5일 40시간 근무였으나 한국 광부들은 토·일요일에도 석탄을 캤다. 주말근무까지 다하면 당시로는 엄청난 1200∼1500마르크를 월급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광부들은 그 돈의 대부분을 국내의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에센=하윤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