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소아마비 아들 고국에 두고 이 악물며 일했다

입력 2013-02-11 21:51


#1967년 1월 31일 김포공항을 떠나는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 조신자(79)씨는 울고 있었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세 살짜리 아들을 키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선택한 길. 모질게 마음먹고 또 먹었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이혼 후 아들을 친정에 맡긴 채 도착한 독일 보쿰광산병원에서 조씨는 이를 악물고 일했다.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재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병원과 기숙사 생활을 견뎌냈다. 조씨는 “당시 갱도 작업 중 다쳐 입원한 한국 광부들이 가족 같아서 더 열심히 간호했다”고 기억했다.

월급을 타면 3분의 2는 한국에 송금했고, 나머지 중 절반은 적금을 부었다. 아들뿐 아니라 친정 동생들의 학비도 조씨 몫이었다. 독일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조씨는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16세 때 군산도립병원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하면서 시작한 간호일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6년 만에 독일간호사 면허를, 81년에는 내과와 신경외과 응급 전문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조씨는 “30년 넘게 한 병원, 그것도 중환자실에서만 일해 온 몇 명 안되는 간호사 명단에 낄 정도로 인정받았다”고 자부했다.

조씨는 98년 은퇴할 때까지 내과 및 뇌신경 응급치료 전문간호사 학회에서 수 없이 많은 강연을 하며 한국간호사 실력을 선진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스웨덴,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쿠바 등을 돌며 ‘외상으로 인한 뇌신경 손상환자 간호법’에 대해 강연했다. 2000년에는 일반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공로십자훈장을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다. 46년이 지난 지금 조씨는 당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독일 취업 기회는 하나님이 내게 내린 생명줄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아들은 독일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교수 생활을 하고 있고, 동생도 의사로 성공했다.

#1966년 독일에 온 김민자(70)씨는 어린 나이에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 훌쩍 날아올 수 있었던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애초 김씨는 독일행이 아닌 미국행을 준비했다. 대전간호학교(현 혜천대학) 선배가 미국 볼티모어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씨와 동기 4명은 미국행을 꿈꾸며 영어공부에 매진했다. 하루는 영어선생으로 모시던 퇴임 직전 미군 고위 장교 ‘후랜드 할아버지’가 우리를 불러 서독 간호사 모집 광고를 보여줬다. 김씨는 “할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서독에서도 군 복무를 했는데 참 아름다운 나라다. 서독에 갔다가 미국으로 가기는 수월할 것’이라고 응모를 권하며 한독사전을 선물해주셨다”고 말했다.

김씨는 독일행을 결심했지만 부모님 설득은 쉽지 않았다. 5급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 철도병원에 취직했을 때도 부모님은 서울로 직장을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시작한 독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4명의 동기들과 함께 도착한 병원은 당초 고용계약서에 서명했던 곳이 아니었다. 쾰른비행장에서 잘못 배치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쿠젤기독교병원에 오게 된 것이다. 김씨는 “동기들과 오랜 토론 끝에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바에야 나라 망신시키지 말고 한국 간호사의 실력을 보여주자고 뜻을 모았다”고 기억했다. 독일 시골 마을에서 3년을 지낼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했지만 막상 근무를 시작하고 나니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김씨는 “정맥주사나 근육주사는 으레 우리 몫이었고 환자들은 한국 간호사들만 찾았다”며 “언어가 달라도 눈치가 빨라 고비를 넘기곤 하면서 우리들도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일인 동료들과 주민들도 김씨가 향수병에 걸리지 않도록 배려해줬다. 집으로 초대하고, 행사를 열어주기도 했다. 서러운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씨는 “정말 한국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배추도 고추도 마늘도 없었다. 동료들과 둥근파를 볶아먹으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럴수록 한국에 편지를 쓰고 목이 빠지게 답장을 기다렸다”고 회고했다.

당시 봉급은 700마르크 정도. 생활비만 빠듯하게 남겨놓고 부모님의 생활비와 늦둥이 막내 동생 대학 학비로 다 보내야 했지만 가족을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로 흐뭇했다고 김씨는 기억했다. 3년 계약이 끝나면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지만 행운의 꽃이 김씨의 계획을 뒤바꿔 놓았다. 꽃을 매개로 당시 서독 수도 본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던 남편 페터 슐뢴도르프를 만났고, 독일에 정착하게 된다. 정부 소속 수학연구원에서 근무했던 남편은 이후 정부 지원으로 남미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김씨는 “내가 쿠젤에 가지 않았더라면 남편도 못 만났을 것”이라며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에서 산 덕분에 외부, 특히 한국 간호사들의 소식이 끊긴 채 오붓하고 청순하게 전원생활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씨와 김씨처럼 1만여명의 파독 간호사들은 저마다 사연을 갖고 지금은 한국과 독일, 미국 등지에서 흩어져 살고 있다. 독일 생활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다. 대부분 한국에서의 간호일과 다른 심부름, 청소, 침대보 갈기, 창문 닦기 등 허드렛일까지 해야 하는 독일 병원의 간호와 간병 업무에 처음에는 당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간호일 자체가 갖는 독일적 특성을 파악할 만큼 오래 일한 간호사들은 대체로 차별 없는 직업 생활을 했다고 평가했다.

임금도 근무 경력에 따라 독일 간호사와 동등하게 받았다.

초기 간호사 파독을 주도했던 이수길 박사는 “한국 간호사들의 평균 월급은 700마르크에서 950마르크 정도였다. 700마르크는 원화로 4만5000원 정도인데 당시 한국의 장관의 월급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파독 간호사들에게 주목해야 할 것은 또 있다. 당당하게 독일 정부와 병원에 권리를 요구한 점이다. 1977년 독일에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외국 인력을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벌여 나갔다. “우리는 필요할 때 가져왔다가 필요 없으면 버리는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는 이들의 호소는 독일 전역으로 번졌고 한국인 간호사들은 독일 시민들과 연대해 1978년 사실상의 무기한 노동권을 따냈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