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황홀] 강이 풀리면
입력 2013-02-11 17:16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 님도 탔겠지
님은 안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님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김동환(金東煥 1901~?)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파인(巴人) 김동환의 시다. 파인은 서울서 중동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도요(東洋)대학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 언론인과 문인으로 활동했다. 아내인 소설가 최정희씨와 함께 장안에 뜨르르하게 이름을 날리다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두 딸 지원(얼마 전 뉴욕에서 작고)과 채원은 모두 개성적인 소설가가 되었다.
가곡으로도 만들어진 이 시는 소품처럼 단조로워 보이지만 뜯어보면 볼수록 맛이 있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온다 → 배가 오면 님이 탄다 → 님이 못타면 편지를 보낸다는 삼단논법식의 추리가 들어맞지 않는 데서 묘한 시적 긴장감이 발생한다. 2연은 1연의 순차적 논리가 아니라 심리적 논리의 귀결로 나아간다. 봄이 오면 강이 제 멋에 풀린다 → 그 강에 배가 왔는데 님은 타지 않았다 → 시인의 설움은 제멋에 풀리지는 않는다.
두 개의 연이 모두 시적 반란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보여주는 맛은 절망과 설움을 넘어서는 데 있다. 배는 내일도 오고 기다림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제목은 말해준다. 강이 풀리면… ‘결국은 님도 온다.’ 사는 일이 다 이런 기다림 속에서 진행된다. 어디서나 실시간 문자 왕래가 가능한 세상에 봄이 와야 편지를 받게 되는 저 기다림이 그립다. 게다가 장황하지도 않고 격조를 잃지도 않으면서 맞춤하게 마무리하는 진술의 능력이 그지없이 돋보인다. 시의 완성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18일이 대동강도 풀린다는 우수(雨水)다.
임순만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