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14) 다시 미국길… 익명의 천사 “매월 1000달러 돕겠다”
입력 2013-02-11 16:37
악장에서 물러난 뒤 억울함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지만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유학을 떠날 결심을 했다. 1996년 12월 31일 장학금과 생활비를 일부 지원해 준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지금까지 이룬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 같은 허망함을 느끼기도 했다. 또 유학 준비를 하고 나니 수중에 돈이 남지 않았다. 두 아이를 키우는 30대 후반의 가장이 살림도 빠듯한데 유학길에 오른다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보장된 미래도, 마땅한 생계 수단도 없이 상아탑에 갇혀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모한 유학길에 나선 이유는 대전에서 ‘아마빌레 실내악단’을 5년간 이끌며 지휘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한번 맛보면 헤어날 수 없다는 지휘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데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더라도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말이 정확하다.
가난으로 고생할 가족들이 걱정됐다. 빨리 박사과정을 마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97년 여름 생활고는 깊어졌고 나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봤다. 한 지방의 교향악단에서 제2바이올린 수석주자를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지원자가 5명밖에 없었다. 당시 그 자리는 이미 상임지휘자와 친분 있는 사람으로 잠정 결정된 상황에서 구색맞추기식 오디션을 열었다는 말을 나중에야 들었다.
그런데 내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합격했다. 당시 영국에 있던 상임지휘자도 녹음된 내 연주를 듣고는 오디션 결과를 인정했다. 생활비를 보태며 연주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 아울러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맡으며 기도를 쉬지 않았다.
보통 4년 만에 마치는 박사과정을 나는 2년반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앞길은 막막했다. 더 이상 학생 신분이 아니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처음 미국 유학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 김태경 목사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다. 로스앤젤레스에 계시던 목사님의 배려로 나와 아내는 작은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로 사역하면서 매일 새벽기도를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학생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기간은 1년. 이 기간에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때쯤 익명의 천사를 만났다. 한 교인이 매달 1000달러씩 우리 가족을 위해 헌금하겠다고 나섰다. 이분의 도움으로 나는 숨통이 트이게 됐다. 고마운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채용공고만을 뒤지던 어느 날 교수 채용 정보를 알려주는 인터넷 신문의 메일 한 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교에서 바이올린 지도교수를 뽑는다는 공고였다. ‘바이올린 전공자, 현악 4중주 경험자, 지휘를 할 수 있는 자’라는 지원 자격은 꽤 이례적이었다. 한 분야의 전문가를 뽑는 게 아니라 세 분야, 그것도 내가 공부한 세 분야를 경험한 사람을 뽑는 것이었다.
완벽한 영어 문장으로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으면 제대로 읽지도 않고 떨어뜨린다는 말이 기억났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스스로 적어냈다. 이미 다른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들을 포함해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내가 채용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