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개인으로 개인되게 하라

입력 2013-02-07 17:44


근래 터진 이마트 직원에 대한 회사 측의 감시와 협박 사태는 심히 충격적이다. 현 정부의 민간인 사찰 파동의 여진이 엄연히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이는 명백히 개인의 인권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인 동시에 노조 설립이라는 합법적 캠페인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짓누르는 큰 잘못이다.

무노조 경영이 회사 이념이라 해도 일개 회사의 이념을 내세워 칼자루를 쥔 사주세력이 국가의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약자인 직원들의 권리 주장을 겁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장실 가는 것까지 따라붙어 찰거머리같이 미행했다니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감시와 검열의 추억?

우리사회는 은연중 개인의 사생활에 불필요한 관심을 갖고 쓸데없이 참견하는 성향이 강하다. 남의 사생활을 천연덕스럽게 침해하고 개성을 별종 취급하는 버릇도 완고한 편이다. 시민사회가 권력기관의 정직함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감시하고 압박하는 선의의 실현은 버거운 반면 체제의 중심세력이나 권력기관들이 국민 개개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며 인권을 비트는 데는 능란한 수완을 보인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이는 점점 더 복잡하게 변화되고 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 만인을 향한 만인의 폭로라고 할 만하다. 익명으로 벌떼처럼 몰려다니며 특정 개인을 지지하고 옹호하거나 까발리고 심판하길 좋아한다. 그것이 ‘흐름’을 탈 때는 맹목적이 되어 개인의 창의적 상상력은 좀처럼 대접받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성형 수술한 얼굴 부위조차 천편일률적이고 청소년들의 신발과 의복조차 획일화된 유행을 탄다. 조직논리를 앞세우는 집단주의의 망령이 ‘아니요’라고 말할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인 도전정신을 은근히 좌절시키곤 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논리로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를 억누르던 전통이 성서에도 나온다. 아간의 노획물 절취 범죄에서 보듯 개인의 잘못이 집안 전체를 몰락시키는 연좌제의 원칙에 따라 처벌되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신실한 조상의 은혜가 천대까지 미치고 징벌이 삼사대까지 이르리라는 약속도 이런 공동체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를 전후하여 이스라엘 역사 속에도 회의하는 주체적 개인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이스라엘의 속담이 앞으로 통하지 않게 되리라는 에스겔의 예언은 더 이상 연좌제를 통해 개인의 책임을 집단논리에 묻어둘 수 없게 되리라는 주체적 개인의 시대를 예고했다. 그것은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책임과 권리를 온전히 그 개인이 담당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더 이상 허울뿐인 공동체의 명분을 내세워 운명을 개척하고 결단하려는 개인의 주체적 인격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개인의 권리와 책임 중시해야

행인의 가방을 뒤지고 군대와 감옥의 편지를 검열하는 것이 일상의 규범이다시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독재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권력집단은 국민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의 행방에 늘 불안했던 것이다. 초법적인 소수집단이 제 권력유지에 방해가 되는 다수 국민에게 불법의 딱지를 붙여 어지간히 핍박하던 때였다. 그런데 법치의 내막을 차분히 살펴보니 정작 불법의 장본인들은 감시와 검열을 밥 먹듯이 일삼던 바로 그 권력집단으로 판명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감시와 검열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섬뜩한 풍경을 간간이 접하게 된다. 자기 앞가림 잘하고 건강한 비판정신을 지닌 개인들이 되도록 힘써보자. 인권과 개성을 존중받는 창조적 개인들이 단합하여 튼실한 공동체를 건설해 보자. 그럴 만한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국가든, 회사든, 권력기관이든, 일단 개인으로 개인 되게 하라!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