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실직, 처음엔 무너졌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슬픔도 힘이 된다’

입력 2013-02-07 16:56


슬픔도 힘이 된다/DW 깁슨/나무의 철학

그들은 서로 다른 이름과 직업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의 같은 이름을 가졌다. 실·직·자. 이 슬프면서 사회적인 세 음절의 단어는 책에 등장하는 미국인 31명을 특징짓는 같은 이름이다.

일.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그러면서 아무나 하지 못하는 바로 그 일의 영역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자의는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흔히 얘기하듯 ‘해고된’ ‘짐 싸게 된’ ‘잘린’ ‘쫓겨난’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2007년 미국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는 경제 위기 와중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저자는 2011년 실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실직자를 찾아 5개월에 걸쳐 미국 50개주를 누볐다.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도서관, 주차장, 패스트푸드점, 노조 회관, 싼 모텔 방, 술집 등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먼저 카메라에 담겨져 반향을 일으켰던 얘기가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이다.

책에는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청년에서 노년까지, 화이트칼라의 전문직에서 공장 노동자까지. 일이 갖는 의미도 가지가지다. ‘너무나 (일이) 재미있어서 감사할 마음뿐이었던’ 직장 초년병, ‘나름 개천에서 용 난 축에 들었다고 자부했으나 새 직장에서 또 7개월 만에 잘린’ 지방 출신 박물관 직원, ‘한 건물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던’ 인사팀 중견 관리자….

어쨌거나 그들은 어느 날 책상 위를 정리하고 짐을 싸야 했다. 이후 내면에 몰아친 폭풍을 견디는 게 쉽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무너지는 자존감, 우울증과 분노, 대인기피증…. 경제적 불안 못지않게 그들을 밑바닥으로만 밀어 넣는 감정적 압박에 대해 얘기할 때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담담한 어조인데도 가슴 아프다.

“처음 사흘간은 자유를 만끽했어요. 그러다가 감정의 파고가 몰아쳤어요. 그것도 아주 크게요. 난 많이 울고 많이 잤답니다. 과음에 과식도 했죠. 사람들과 말도 잘 섞지 않았어요. 공공장소에도 가지 않았고요.”

“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전 성실하고 싹싹한데다 엑셀도 잘 다룰 줄 알고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자 나중엔 (내가) 뭔가 잘못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책이 갖는 미덕은 저자의 개입 없이 실직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구술로 담아낸 형식에 있다. 그런데 실직자들이 보여준 의외성이 놀랍다. 실직이라는 청천벽력은 그동안 몰랐던 또 다른 자신의 발견, 질주하다 놓친 것들에 대한 반성 등 발견과 성찰의 계기가 됐던 것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자락을 부여잡겠다는 담쟁이 같은 의지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만나줘서 고맙다’는 솔직한 표현은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이 뭔지 깨닫게 한다.

“1년 넘게 실직 상태인데, 이달 말이 마지막 수당이랍니다. 이쪽 업계에서 내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은 이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비책으로 변화를 택했습니다. 부동산 업계로 진출해 보려고요.”

먼저 실직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막 실직에 직면한 이들을 위해 실용적인 조언도 해준다. ‘구직을 위해 인터넷에 매달리는데 오히려 직장을 구하는 일엔 인간적 접촉이 정말 필요하다’ ‘앞가림을 잘해 나가는 척 하면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등이 그것이다.

전 세계가 실직 공포에 싸여 있는 만큼 실업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태평양 건너 그들의 얘기는 남의 일 같지 않다. 내 주변, 가족, 친구들의 얘기와 다름없다. 그런 묘한 동질의식이야말로 이 책에 손이 가게끔 등을 떠미는 보이지 않는 손일 것이다. 이정아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