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다시 슈마허를 읽는다
입력 2013-02-06 17:48
새 정부의 대체적인 윤곽이 그려졌다. 미래의 성장동력을 모색하는 ‘공룡부처’ 미래창조과학부가 신설됐고, 성장정책을 지휘할 경제부총리가 부활됐다. 외교통상부 산하에 있던 통상교섭 기능이 지식경제부로 넘어갔다. 수출 드라이브를 걸던 제3공화국 시절과 흡사한 구도다.
정부조직 개편안에서 드러난 국정철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신화, 즉 ‘경제성장’ 및 ‘과학기술의 진보’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두 신화, 또는 슬로건은 시효가 지났거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간 경제성장을 떠받쳐온 ‘수출지상주의’는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수출이 늘어나도 국민들의 후생은 증가하지 않는다는 게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소수의 수출 대기업은 덩치를 키워가지만 그들이 거둔 이익은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규모별, 부문별, 계층별 격차는 커져만 갔다.
경제성장주의 또한 값싼 석유의 시대가 끝나가면서 한정된 자원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 오늘날 우리의 대량소비와 세계화된 경제가 대량의 저가석유 덕분이라는 점은 독일 태생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가 일찍이 간파했다. 그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1973년 10월 6일 이후 모든 것은 예전 같지 않게 됐다”고 77년 미국 순회강연에서 말했다. 그는 “재생불가능한 자원, 즉 석유에 의존하는 현대화된 농업시스템으로 40억 인구(77년 당시)를 먹여 살리려면 농업 한 분야에만 지난 30년간 발굴한 석유 매장량을 죄다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값싼 석유가 운송에너지가 되면서 ‘흉물스러운 대도시의 출현’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대량생산 방식과 대규모 자본이 경제와 생활양식을 지배하게 됐다는 것이다.
슈마허가 보기에 헐값이던 화석연료 덕분에 기술은 네 가지 방향에서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지고, 생산에 드는 자본비용이 더 커졌으며, 폭력성을 지니게 됐다. 신물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독성을 확산시키고, 자연에 폭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폭력은 언제든지 동료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바뀔 수 있다.
물론 과학과 기술은 끝없이 진보한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기면 과학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의 폐해들은 현재의 기술 변화가 해결책이기는커녕 점점 더 문제의 일부가 돼 가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슈마허는 현대사회의 문제들이 대부분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기술의 성공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슈마허는 “이제 대량의 저가 석유시대가 끝나감에 따라 조만간 대량생산 방식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저서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슈마허는 “소규모로 가능하고 단순한 기술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을 그는 ‘중간기술’이라고 했다. 중간기술이란 기술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을 기술에 종속시키지 않으며, 중앙집중화나 관료주의적 운영방식을 낳지 않는 작은 단위의 기술을 말한다. 슈마허는 “중간기술은 상징적으로 말해 괭이와 트랙터의 중간”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중소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대기업 하도급업체 비중이 너무 높다. 제조업의 경우 80%가 하도급업체라고 한다. 지금 같은 원청 대기업 전횡구조 아래서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으로 클 수도, 고용을 늘리기도 어렵다. 지방에 고용창출 효과가 큰 재생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중간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모델의 중소기업들이 늘어나야 한다. 슈마허의 선견지명을 되살려 수출 대신 내수, 거대기술 대신 중간기술, 화석연료와 원자력 대신 재생에너지, 도시집중화 대신 지역적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을 국정기조에 반영해야 한다.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