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레미제라블, 바리케이드 너머

입력 2013-02-06 16:47


마태복음 5장 1∼12절

최근 문화계 이슈는 영화 ‘레미제라블’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작품으로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노역의 현장을 담은 첫 장면도 압도적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바리케이드 위에서 부르는 민중의 노래는 가슴 뭉클한 감동의 여운을 남깁니다. “성난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민중들의 노래/ 가슴의 심장 소리는 북소리의 울림이며/ 내일이 오면 새 삶이 시작되리라/…저 바리케이드 너머는 우리가 꿈꾸던 세상/ 우리의 혁명에 가담하겠소?/ 우리에게 자유를 줄 싸움에 참여하라!”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 비천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야기의 주역들은 주인공 장발장을 포함해 모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굳이 내용을 요약한다면 불쌍한 사람들이 꿈꾸는 ‘내일’, 곧 가난이라는 바리케이드, 비참한 현실이라는 바리케이드 너머 꿈꾸는 새 삶이라 할 것입니다. 아쉽게도 목숨 바쳐 꿈꾸던 세상은 영화 속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혁명은 정권을 잡는 것도, 큰 부요를 얻는 것도, 신분이나 지위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에겐 일상이 되는 소박한 꿈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을 뒤덮는 한숨과 탄식이 레미제라블 속 상황과 참으로 유사합니다. 신문 사회면만 들춰봐도 레미제라블판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결국 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은 인류역사 속에 필연의 운명처럼 살아왔고 어김없이 소박한 일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레미제라블을 위한 영원한 혁명가, 완벽한 승리자가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바리케이드 너머 진정한 새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승리와 복된 삶이 바로 레미제라블,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라는 선언입니다. 그 주인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입니다. 마치 영화 속 인물들을 재현해 놓은 듯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레미제라블’의 나라입니다. 그곳은 위로와 배부름, 긍휼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완벽한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나라를 약속받은 레미제라블입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스크린 속 바리케이드 너머엔 우리가 앉아 있습니다. 바리케이드의 선봉에 우뚝 선 혁명군 지도자들은 배불리 먹고 안락하게 살 수 있지만 스스로 레미제라블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리케이드 너머 관객들에게 외칩니다. “혁명에 동참하겠는가? 스스로 낮아지고 천해지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보좌를 버리고 ‘레미제라블’을 자청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긍휼의 산 모본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죄로 막힌 바리케이드, 십자가 너머 새 생명의 세계를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 현실 속 ‘레미제라블’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리케이드 너머 온전한 새날, 하나님나라를 위해 당신은 ‘혁명의 동지’로 초청받았습니다. 그 천상의 부르심에 대한 당신의 응답에서부터 ‘레미제라블’, 당신의 이야기가 이 땅에서 이어질 것입니다.

주희현 목사 (아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