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2월 7일] 두려움
입력 2013-02-06 16:47
찬송 : 내가 매일 기쁘게 191장(통42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도행전 19장 17∼20절
말씀 : 본문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지요. 무엇이 그 오만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높이도록 했습니까? 무엇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헬라인으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떨리는 음성으로 찬송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에베소 시민들로 하여금 평생 생업의 수단이었던 마술 책을 불사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토록 했습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고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두려움’이란 감정이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17절)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 두려움이란 인격을 파괴하고 사회생활을 소극적으로 만드는 자폐증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그 삶을 바로 세우는 건설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을 내쫓을 때와 바울과 그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을 때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주문·주술에 의지해 귀신을 내쫓으려고 하는 반면, 바울과 그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습니다. 놀라운 것은 귀신이 먼저 알아보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 19:15)
에베소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악령이 존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존재한다는 영적 실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꼼짝 못한다는 영적 현실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령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신적 능력을 역력하게 드러냈습니다. 교회에 신적 능력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인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출애굽기 11장 3절을 보면 바로왕과 그 신하들이 모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관한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바로 앞에 나타난 모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단지 가축을 몰고 다니는 데 필요한 지팡이 하나를 든 남루한 행색의 목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팔십 고령이었습니다. 어디 한군데 위협을 느낄 만한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칼도 창도 완력도 돈도 권력도 배경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와 그 신하들 그리고 백성 앞에서 ‘두렵고 큰’ 인물로 보였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권세가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적 권세가 실재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주님.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적 권세가 실재하는 곳임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신령한 두려움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진홍 목사(우이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