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13) 꿈에 그리던 고향 대전시향 악장으로 ‘금의歸國’

입력 2013-02-06 16:48


나는 박사과정의 전공을 지휘 분야로 택했다. 지휘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도로시 클로츠만 학장님께 지휘를 배우면서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연주 일정도 많아졌다.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 마이애미, 일본 등지에서 100여 차례 실내악 및 협주에 참여했다. 아스펜 국제음악제, 안톤 베베른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츠하크 펄먼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연주했다.

박사과정 공부와 연주 활동을 병행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에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마침 한국에서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한 대학에서 음악과 교수 채용 공고가 떴으니 지원해 보라는 것. “자주 나는 기회가 아니니까 한번 원서라도 넣어봐. 너 정도면 되지 않겠어.”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내심 기대됐다. 유학생활이 길어지면서 나와 아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고 살림은 쪼들렸기 때문이다. 얼마 뒤 지원했던 대학의 학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식사자리를 하자는 제안을 받고 기대는 더욱 커졌다.

한국에 들러 학과장을 만났다. 한동안 나를 응시한 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의실은 2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좀 힘드실 거 같은데요. 휠체어에 앉으셔서 칠판을 이용하기도 버거우실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을 거 같은데….”

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모멸감마저 느꼈다. 너무 화가 나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장애인은 채용 안 하신다는 말씀이군요.” 차라리 이런 얘기를 듣지 않고 탈락했다면 실력이 모자란 탓으로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장애인을 차별하는 분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 계시던 고(故) 정두영 선생님께서 특별한 제안을 해주셨다. “차 선생님, 한국으로 오셔서 우리 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아주실 수 없으신가요. 차 선생님만큼 실력을 갖춘 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꼭 모시고 싶습니다.”

정 선생님은 친분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나를 추천해 주셨다. 무엇보다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만만치 않은 곳에서 실력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나는 주저 없이 박사과정을 미루고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일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교향악단의 연습을 했고 목요일마다 대전 극동방송에서 클래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명곡산책’을 진행했다. 저녁에는 내 연습실에서 학생들에게 레슨을 해줬다. 또 1주일에 한 번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여러 일을 하면서 내 평생 처음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한국에 올 때 갖고 들어온 돈은 30만원뿐이었다. 집을 마련하고 중고차를 사기 위해 대출을 했는데 어느 새 저금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대전에 온 지 6년 만에 빚도 다 갚고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 선생님께서 대전시향에서 사임하신 뒤 몇몇 단원 간에 불화가 생겼다.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려던 나는 되레 오해를 사게 됐고 악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나를 밀어내려던 단원들은 내 단짝 친구를 고발하기도 했다.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해서 내 명의를 빌려주었던 친구가 관세법을 어긴 실수를 찾아낸 것이다. 친구와 나는 법정에까지 서게 됐다.

당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며 서명운동에 나선 고마운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3∼4명의 단원을 제외한 대전시향 단원 전체와 교인 수백명이 서명해 주셨다. 모두 내 부족함 탓에 벌어진 일인 만큼 미련 없이 악장 자리를 내놨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