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12) 박사시험 탈락… 교수들 항의에 개교 이래 첫 재시험

입력 2013-02-05 17:03


지휘 수업은 끝났지만 도로시 클로츠만 학장님은 나를 1대 1로 지도해주셨다. 은퇴를 눈앞에 둔 노 교수님은 지휘자로서의 자세와 세밀한 테크닉을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셨다. 주고받는 문화에 익숙한 미국에서 아무 대가 없이 한 학생에게 레슨을 해준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학장님의 따뜻한 배려로 음악 실력은 크게 좋아졌지만 생활비가 큰 문제였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집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큰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뉴욕의 월세방을 알아보고 다녔는데 우리 형편으로 구할 수 있는 곳이 드물었다. 어렵게 찾아낸 지하 월세방은 눅눅했고 내려가는 통로도 계단으로 돼 있어 출입이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알고 지내던 분이 중고차를 주셔서 한동안 요긴하게 사용했지만 눈이 쏟아진 어느 겨울 다리 위에서 차가 멈춰 폐차했다.

부잣집 장녀로 자라서 험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아내에게 미안했다. 아내는 만삭인 상태로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의 가발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또 좁은 방 안에서 성능도 좋지 않은 재봉틀로 밤새도록 봉제 일을 했다. 저녁 땐 내가 봉제 일을 도왔지만 아기를 돌보면서 재봉틀질까지 하는 아내를 보면서 속으로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우리는 종종 당시를 떠올린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어느 때보다 서로 의지하고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석사 과정을 무사히 마친 나는 박사 학위에 도전했으나 불행히도 실기 시험에서 낙방했다. 무난히 패스할 것이라는 말씀을 주변에서 자주 들었고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떨어졌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진로를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낙방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한 교수님은 “차인홍씨가 실기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한 것은 채점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흥분하셨다. 뒷말이 많아졌고 급기야 몇몇 교수님들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해 교수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는 심사위원들이 공평하게 참여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결론이 났다. 내가 시험을 보던 날 각 캠퍼스의 음대 교수들이 심사에 참여했는데 내가 다니던 브루클린칼리지 교수님들만 공연 일정 등으로 한 명도 참여하지 못하셨다. 내 편에 서 주신 교수님들은 “다른 캠퍼스 교수들만 채점위원으로 참여한 시험에서 낙방한 만큼 공정한 상황에서 재시험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클로츠만 학장님은 이의제기를 받아들여 박사과정 실기시험을 다시 보도록 하셨다. 이전보다 더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고 각 캠퍼스 교수들이 빠짐없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합격했다. 재시험 사건은 개교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합격 소식을 들은 클로츠만 학장님은 크게 웃으셨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장학금 추천서를 써주셨다. 학비를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3000달러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추천서였다.

유독 내 주변에는 클로츠만 학장님을 비롯해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이다. 한때 조건 없이 나를 돕는 분들을 보면서 장애인이라서 동정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고쳐먹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밤을 새우며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선의의 도움들이 앞으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