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11) “30분 길이 악보 외워라” 숙제… 한달간 밤샘 연습
입력 2013-02-04 17:12
나는 미국 유학 이전에 이미 오랜 기간 바이올린을 연주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라살 4중주단의 연주는 듣고만 있어도 레슨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배울 점이 많았다. 곡의 분위기와 감정을 살려내는 연주법과 연주자들 간의 하모니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라살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인 월터 레빈 교수님의 수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첫 시간에 그는 한 마디의 연주법을 갖고 1시간을 강의했다.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 ‘황제’의 한 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한 마디를 어떻게 연주하느냐를 놓고 1시간을 쓰신 것이다. 감정을 담은 음정을 정확히 소리 내는 방법과 활의 위치를 세밀하게 배울 수 있었다.
레빈 교수님은 우리에게 어려운 숙제를 내주시기도 했다. 황제의 전 악장을 외워서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30여분 길이의 곡을 악보를 보지 않고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전의 허름한 집에서 합숙하던 때를 떠올리며 “그래, 한번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밤잠을 줄여가며 연습을 했다.
드디어 숙제를 검사받는 날 레빈 교수님은 직접 악보를 치운 뒤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내셨다. 꼴깍 침 넘기는 소리만 들렸고, 목이 뻣뻣해질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레빈 교수님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곧바로 연주실로 가자”고 해 베데스다 4중주단의 연주를 녹음해주셨다.
아마 레빈 교수님은 음악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후 우리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연주에 미쳐 있는지를 아셨는지 레빈 교수님은 우리에게 국제 음악캠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등 여러 차례 선물을 주셨다.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음악 공부를 더 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음악이론을 공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신세계와도 같았던 새 연주법을 배우고 음악적 시야를 넓히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나는 신시내티대를 졸업하고 뉴욕 브루클린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뉴욕의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한참 공부한 뒤에야 이곳으로 나를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사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대 학장이자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도로시 클로츠만. 독일 태생의 이 교수님은 나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재활원 시절의 강민자 선생님처럼 따뜻한 배려를 해주셨다. 워낙 호랑이 선생님으로 알려진 분이라 다가가기 쉽지 않은 분이었는데도 내게는 관대하셨다. 또 큰 연주회가 잡히면 자주 나를 솔리스트로 세워주셨다. 나는 어머니 한 분을 더 얻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장실을 드나드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무렵 클로츠만 학장님은 지휘 수업을 새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정식 수업은 아니었고 교수님이 지휘자 후배를 키우기 위해 개설한 강의였다. 나는 관심이 많은 분야인 데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학장님의 강의를 듣고 싶어 참여했다. 어린 시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들으면서 막연히 ‘나중에 내가 지휘를 할 수 있을까’란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수업은 두 학기 만에 폐강됐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그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