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범수의 빤스
입력 2013-02-03 17:14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아홉 가지의 다른 방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에니어그램에 따르면 나는 6유형 ‘충성가형’이다. 이 유형은 일반적으로 풍부한 상상력과 통찰력이 있으나 미리 걱정을 하는 경향이 있어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서 상황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하는 성격이라 문제 제기자, 의심이 많은 사람, 회의적인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범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짝이었다. 시골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었지만 눈이 크고 선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이것이 내가 범수에 대해 기억하는 전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을 뜬 후 이러저러한 이유로 20년 넘게 친구들과 소식이 끊겼으니 내게 고향 친구들은 막연한 인상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추억은 거의 없다. 아마 그들도 나에 대해서 마찬가지겠지만 가끔 서울 생활이 힘들 때 고향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상상해본 적은 많다.
같은 통학버스를 타고 같은 풍경을 공유하고 같은 날씨에 영향을 받고 같은 사람을 서로 짝사랑하고 있을까. 서로의 10대, 20대 때의 변천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만나면 1박2일 밤을 새우는 건 아무 일도 아니겠지.
무엇보다 그들에겐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나눠 가진 비밀을 여전히 간직하며 우정과 신뢰를 견고히 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테지. 그러니 의심이 많고 회의적이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항상 염두에 두는 6유형의 사람인 나는 매번 범수가 주재하는 모임에 불참자가 되곤 했다.
지난주 범수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새해 첫 동창회 모임이 있으니 이번에는 꼭 한번 내려오라고. 원고 마감을 핑계 대느라 쓰고 있던 원고를 보내줬다. 답장이 왔다.
너의 ‘도시락 셔틀’을 읽으니깐 난 참 행복한 어린이였네. 비록 엄마가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때까지 누나들 팬티를 물려 입었지만. 2학년 체육시간에 학교 앞 냇가로 수영하러 갔었는데 내가 여자 빤스 입고 있다고 니가 놀렸던 거 기억나니? 그때 창피해서 죽고 싶었는데 이렇게 잘 살고 있다. 다음 모임 땐 꼭 얼굴 보자.
에니어그램 9유형 ‘화합가’일 것 같은 범수는 여전히 뚝심 있게 고향을 지키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의심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는 아마 범수의 빤스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러 다음 동창 모임엔 제일 먼저 달려갈지도 모르겠다.
안현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