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속 세상] 추억을 파는 극장… 어르신들 ‘청춘 필름’ 돌아간다

입력 2013-02-03 16:54


부부가 모처럼 동반 나들이를 한 걸까. 분홍빛 립스틱을 살짝 바른 할머니가 곁으로 다가가자, 중절모가 멋들어진 할아버지는 쑥스러운 듯 옆걸음질을 친다. 옆에서 서로 손을 꼭 잡은 60대와 30대 모녀가 이 모습을 보며 살며시 웃는다. 주위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정다운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 낙원악기상가 4층 ‘실버영화관’. 로비에서 상영 시간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풍경이다.

“그땐 신성일에게 푹 빠졌었다우. 신성일 나오는 영화는 죄다 봤어요. 그 시절의 영화를 다시 보노라면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지.”

이곳은 ‘어르신의, 어르신들에 의한, 어르신을 위한 극장’이다. 서울이라는 거대 공간이 죄다 젊은이들의 터전이 된 마당에 노인들을 위한 공간도 필요하다는 뜻에서 2009년 옛 허리우드 극장을 리모델링해 개관했다. 적은 돈을 들이고, 실버 세대끼리 소통하고, 덤으로 추억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기본 콘셉트다.

매주 금요일마다 찾는다는 남문희(75)씨는 “옛날엔 영화관이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며 “이렇게 매주 영화관을 찾아 추억의 영화를 다시 보다 보면 청춘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실버영화관은 일반인 관람비가 7000원이지만 55세 이상 어르신은 2000원만 내면 입장할 수 있다. 상영작도 과거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영화들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 ‘미워도 다시 한 번’ ‘맨발의 청춘’ ‘닥터 지바고’ ‘벤허’ 등 개관 이래 지금까지 200여 편을 상영했다. 지금까지 누적 관객은 53만명.

“요즘 어르신들은 갈 곳이 없어요. 돈이 없으니 반기는 곳도 없죠. 집 밖으로 나와서 하루라도 즐겁게 보내시라고 실버영화관을 개관했습니다.” 실버영화관 김은주(40) 대표는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버 문화를 개척할 생각이다. 매주 월요일엔 자원봉사자들이 콘서트를 연다. 주변 식당, 이발소, 떡집 등도 500원 할인된 가격에 동참하고 있다.

실버 영화관은 전국에 세 곳밖에 없다. 이곳과 안산 명화극장, 그리고 서울시가 메가박스에 위탁해 운영하고 있는 은평의 ‘청춘극장’. 이 같은 실버 문화공간이 더 생겨 어르신들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글 = 이병주 기자 ds5ec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