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토록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사실 나는 이성에 관심이 막 생기던 때조차 애써 이를 외면하려고 했다. 바이올린을 연습하면서 외로움을 달랬을 뿐 나에게 연애란 참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여겼다.
연탄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바이올린 연습에만 몰두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내가 사랑의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간혹 나와 사소한 말다툼을 할 때 아내는 예전 일을 떠올리며 농담처럼 말한다. “나한테 데이트 신청했던 대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그때 차 한 번 안 마시고 오빠만 기다렸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나.”
아내와의 데이트는 순조롭지 않았다. 성공적인 데이트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택시를 잡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 나를 보고 지나치는 택시들이 많았다. 한번은 내가 택시 문을 연 채로 잡고 있었는데 택시기사가 다른 손님 앞으로 차를 모는 바람에 사고를 당할 뻔한 적도 있다.
둘의 감정이 예사롭지 않게 됐을 때 정립회관 관장님과 이사님 부부께서 우리를 조용히 부르셨다. 두 분은 소아마비협회 관장과 이사를 각각 맡고 계셨다. 미국 유학 준비가 거의 마무리됐을 때였다.
“인홍이가 미국으로 곧 떠나는데 둘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무책임한 답변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와의 교제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실 아내의 부모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에게 멋지게 프러포즈도 하고 남자답게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던 이사님은 “떠나기 전에 약혼식을 하는 게 어떨까. 준비는 우리가 해줄 테니”라고 하셨다.
유학길에 오르기 바로 전날 ‘비밀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식에는 친구들과 가족 200여명이 모였지만 아내 쪽 가족은 처남 한 명뿐이었다. 여전히 아내의 집에서는 나와의 교제가 비밀이었다. 아내는 약혼식 내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유학생활 2년이 지났을 때쯤 나는 용기를 냈다. 일본에서 공연 일정을 마친 뒤 한국에 들러 장인 장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을 계획이었다. 처가에서는 뒤늦게 처남을 통해 우리의 약혼 소식을 알고 계신 터였다. 그러나 나는 두 분을 찾아뵙지도 못했다. 몰래 약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에 두 분은 노발대발하셨고 나는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식을 올리기 전까지 미국에서 따님과 함께 지내려고 합니다”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장인 장모님이 마음을 돌리신 결정적인 사건은 아내의 가출이었다. 두 분은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소심한 아내가 나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혼자 떠났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끊임없는 설득 끝에 결국 장인 장모님은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주시기로 했다.
우리는 기숙사 원룸에 신혼살림을 차린 뒤 1984년 12월 15일 미국 신시내티한인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지금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간절한 기도로 부족하기만 한 나를 붙잡아준 아내 조성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유학기간 동안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던 것도 아내의 도움이 컸다.
신시내티대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베데스다 4중주단의 가능성을 알아봐주신 ‘라살 4중주단’의 교수님들을 먼저 만나보고 싶었다. 명성이 높은 분들의 연주를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실제 라살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인 월터 레빈 교수님의 첫 강의는 충격이었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역경의 열매] 차인홍 (10) 유학길 오르기 바로 전날 ‘비밀 약혼식’ 올려
입력 2013-02-03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