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생명나눔-인체 조직 기증] (하) 해외의 기증 체계와 나눔 문화
입력 2013-01-31 22:20
英 ‘볼턴의 기적’… 기증자 26명서 200여명으로 껑충
인체조직 기증률이 높은 세계 각국의 특징 중 하나는 장기와 인체조직 기증을 통합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국가 차원에서 법령과 제도를 지속적으로 정비하고 재정을 뒷받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병원, 의료진 차원에서도 각종 홍보 및 예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기증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가고 있다.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기증률이 저조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홍보활동과 법 시행 등을 통해 기증률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영국의 인체조직 기증과 나눔문화, 기증체계 등을 현장 취재했다.
한국 축구선수 이청용이 뛰고 있는 볼턴 원더러스FC의 연고지인 영국 볼턴. 그레이트맨체스터주(County)에 속한 인구 14만명의 자치구인 이곳에 ‘생명 나눔’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심에 지역 내 유일한 종합병원인 로열볼턴 병원이 있다.
지난 17일 찾은 로열볼턴 병원의 한 사무실. 입구에 보일락말락하게 ‘애도·기증지원 서비스(Bereavement&Donor Support Service)’라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벽 한 켠으로 각양각색의 카드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애도 코디네이터’라고 소개한 데이비드 워커가 카드 하나를 떼내어 보여줬다. 2년 전 볼턴 인근을 지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4살 아이의 심장판막을 기증한 어머니로부터 지난 크리스마스 때 받은 이메일 카드라고 했다.
“그날 일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엄마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어요. 우리는 5∼6시간 유족들을 위로하며 함께 슬퍼했죠. 동료들은 ‘그 질문’을 하지 말라고 말렸어요. 굉장히 힘들었지만 어렵게 말을 꺼냈죠. ‘기증하시겠습니까?’”
엄마의 기증 동의로 아이의 심장판막은 심장질환을 앓던 2명의 어린이에게 이식됐다. 카드에는 ‘우리 아이의 일부가 그들에게 선물이 됐길 바란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로열볼턴 병원이 2005년 도입한 ‘애도·기증지원 서비스’는 세계 각국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 서비스는 인체조직 및 장기 기증을 사망자 애도 서비스와 통합해 ‘임종 케어’의 한 부분으로 다룬다. 5명의 서비스 팀원들은 장례 과정에서 유가족과 슬픔을 함께하며 위로한다. 때론 무릎을 꿇고 유족들과 눈높이를 맞춘다. 그리고 마지막 5분 대화를 통해 기증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다는 말을 꺼낸다. 팀원인 고든 부스는 “애도 기간에 유대와 신뢰가 쌓이면 기증 얘기를 꺼내도 유족들이 불편해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결심한다”고 귀띔했다. 애도·기증지원팀원들은 병원에서 20분 이내 거리에 거주하며 상황발생 시 24시간 응급 콜 시스템을 통해 언제 어디든 달려간다.
이들은 평소엔 지역 내 양로원, 호스피스 기관, 병원, 학교 등을 돌며 기증 교육과 나눔문화 확산에 힘쓴다. 팀원인 리넷 할리웰은 “이곳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대부분 알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 중 한 명 정도는 이곳을 통해 기증되는 과정을 경험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 기증에 대한 질문을 받을 거라 자연스럽게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증이 지역민의 일상에 체화돼 있는 것이다.
병원은 또 2007년부터 기증률을 더욱 촉진시킬 ‘기폭장치’를 마련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의무기록을 지역 내 ‘인체조직 채취 코디네이터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 ‘잠재 기증자’ 확보에 용이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2007∼2008년 모두 31명이 잠재 기증자로 추천됐고 이들 중 9명은 실제 인체조직 기증으로 이어졌다.
로열볼턴 병원의 이 같은 노력은 인체조직 기증의 불모지였던 볼턴 지역의 기증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2002년, 2004년 각각 26명, 33명에 불과했던 인체조직 기증이 2006년부터 200명대로 껑충 뛰었으며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다.
볼턴의 성공 모델은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애도·기증지원팀 피오나 머피 팀장은 “볼턴 인근 프레스턴과 위건, 셀포드 병원 등 3곳이 비슷한 서비스를 벤치마킹해 이미 운영 중이거나 꾸릴 계획”이라면서 “볼턴의 기적은 영국 생명 나눔 문화의 ‘희망 씨앗’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볼턴(영국)=글·사진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