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8) 고교 진학 좌절… 재활원 출신 장애인 4중주단 구성
입력 2013-01-30 18:14
대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교육기관도 찾기 어려웠다. 일본에서 목공이나 인쇄 일을 배웠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바이올린을 배울 형편도 안 돼 집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냈다.
내 미래를 놓고 가족들이 여러 아이디어를 내놨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도장 파는 기술이 어떨까”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을 다시 배우고 싶었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만큼 운동을 더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방황하던 때 강민자 선생님의 대학 후배인 고영일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강 선생님을 통해 알고 지내던 분이었다. 고 선생님은 당시 대전의 한 음대에서 강의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다소 들뜬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다른 생각은 이제 접고 음악에만 전념하는 게 어떨까. 내가 도울 테니 현악 4중주단을 만들어보자.”
재활원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현악 4중주단을 키우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 선생님은 4명에게 연주법을 코치해주셨고 소년원 등지에서의 연주회 일정도 잡아주셨다. 평소에 늘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는 선생님은 연습할 때는 표정이 달라지셨다. 또 엄청난 시간이 드는 숙제를 내주셨다.
성경에서 ‘축복의 연못’으로 기록된 베데스다의 이름을 딴 ‘베데스다 4중주단’. 다시 바이올린을 연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데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1976년 결성된 베데스다 4중주단은 대전 용두동에 작은 집을 얻어 합숙을 했다. 우리는 값싼 악기로 연습했지만 열정은 그 어느 유명한 4중주단보다 뜨거웠다.
나는 합숙소 인근의 교회에 다녔다. 여성 목회자인 김신옥 목사님은 우리에게 쌀과 김치, 밑반찬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찬송가 연주를 하면서 믿음을 키웠다.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회 전반에 남아 있던 시절 목사님은 큰 사랑과 관심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헌금을 하지도 못했고 찬송가를 연주하는 일밖에 돕지 못했는데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주일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 매달렸다. 열악한 환경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 4명은 연탄광, 부엌, 마당, 방에서 각각 개인 연습을 한 뒤 합주를 하는 방식으로 연습했다. 제1바이올린을 맡은 나는 주로 연탄광을 이용했다. 여름에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짬짬이 부채질을 해가며 연습했고 겨울에는 언 손을 녹이느라 고생을 했다. 음대생들이 가끔 우리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러 오기도 했다. ‘안쓰럽다’는 감정이 전해져 때로 비참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우리 네 사람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그 어느 4중주단보다 훌륭한 화음을 만들어낸다고 자부했다.
베데스다 4중주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 여기서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다. 기약 없이 3년여간 연습에만 몰두하는 일에 모두 지쳐 있었다고만 말하고 싶다. 그런데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해체된 지 얼마 안 돼 사회복지단체인 한국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 쪽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에게 연습할 공간과 숙소를 마련해주고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