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넘어 함께하는 우리로 (5)] 박에스더, 여성·빈민 두루 껴안은 ‘Y의 영원한 멘토’
입력 2013-01-30 17:38
YWCA 활동가에게 “당신을 보니 박에스더 선생이 생각난다”는 말만큼의 찬사는 없다. YWCA의 모범적인 활동가들에게 주는 상의 이름이 ‘박에스더상’인 것도 그 이유에서다. 박 선생은 YWCA 안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표본과 모범이 되는 살아있는 모델이었다. 민주적 지도자란 앞에 서서 지휘하거나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잠재력을 살리고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
박에스더는 하와이 호놀룰루YWCA 간사였던 1947년 미국YWCA연합회 국제부 명을 받고 한국 YWCA 고문 총무로 파견됐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한국YWCA의 지도력을 확립하고 조직을 구성하고 재건하는 일에 매진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행동하다
1904년 돌배기 아기 에스더는 하와이 파인애플농장 이민길에 오른 아버지 박종수씨의 품에 안겨 미국행 이민선에 올랐다. 고된 파인애플농장에서 아버지는 신앙생활의 기쁨을 맛보며 한국인 최초의 감리교 목사가 됐고 어머니 김경건씨는 외동딸 보배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용기있게 행동한 구약의 에스더를 본받기를 희망하며 딸의 이름을 ‘에스더’로 개명하고 그 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드릴 것”을 기도했다.
28년 호놀룰루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로하라 하와이고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에스더는 호놀룰루YWCA회장이자 사범대 학장 부인인 앤드루 여사로부터 YWCA 간사가 될 것을 권유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는 처음으로 Y틴 간사가 되어 12년간 활동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인종의 젊은이들이 피부색으로 인한 편견을 갖지 않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협동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헌신했다.
22년에 창설된 한국 YWCA는 일제 강점기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애국운동의 발로였다. 일본 도쿄YWCA기숙사에서 YWCA를 경험한 김필례씨와 중국 베이징 협화여전에서 학생 YWCA 회원으로 활동한 유각경, 이화학당 교수로 있던 김활란 박사 세 사람이 여자기독교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YWCA를 창설했다. 그 후 30년 세계대회에서 정회원으로 인정받았으나 38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일본YWCA에 통합토록 가결된 후 40년 문을 닫았다.
박 선생이 파견 온 47년 즈음 한국YWCA는 해방의 설렘과 조국의 건설이라는 희망 속에 다시 독립된 조직체로서 YWCA로 재출발을 위한 준비가 한창인 때였다. 새로 발족한 연합회 임원진은 한국YWCA 재건을 위해서 하와이에 있는 박 선생을 한국에 빨리 오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미국YWCA에 이를 정식으로 요청, 미국 국제부에서 이를 승인했다.
기초부터 든든히 세우다
박 선생은 회관을 건립하는 문제로부터 Y운동의 근간이 되는 프로그램 개발, 전문직 간사의 훈련과 교육 등 YWCA운동의 핵심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선생은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여성운동을 위한 근거지가 필요함을 역설하며 명동 1가 1번지 1200평의 적산가옥 두 채를 YWCA연합회와 서울YWCA회관으로 받았다. 당시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가난하고 혼돈스러웠던 가운데서도 열심히 모금을 했다. 극장 협회와 협력하는 등 새로운 방법의 모금 활동을 폈고 미국YWCA 국제부위원이었던 매리 록펠러 여사 집안인 록펠러재단에서도 당시 5만 달러라는 막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하여 59년 여성들을 위한 최초의 전당인 서울YWCA 건물을 봉헌하게 됐다.
도움 필요한 곳에서 필요를 채우다
한국전쟁 중에 미국 내에서 박 선생 만큼 열성적이고 효과적으로 한국을 알리고 난민 구호를 위해 적극 활동한 사람은 없었다. 모금활동을 펴는 한편 유엔NGO회의에 YWCA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선생이 한국재건을 돕기 위한 국제연합 한국재건위원단(UNKRA) 조사위원의 자격으로 52년 8월 그리던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았을 땐 임시수도인 항도 부산은 피난민들로 크게 혼잡했다.
6·25 동란 중에도 대한YWCA이사회는 피난지 부산에서 YWCA회관을 짓고 총무와 직원을 서울로 보내 전쟁으로 무너진 서울 연합회와 서울YWCA 건물을 수리했다. 또 동래의 농예원을 복구해 집을 잃고 방황하는 소녀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기술교육을 하도록 하는 사업을 시급히 착수하기로 결의했다. 선생은 전쟁 중에 무의탁소녀들을 수용하여 숙식을 제공하고 시국이 안정되는 대로 농예, 재봉, 편물 등 직업교육을 베풀어 직장으로 내보내는 일종의 직업훈련센터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가치와 사람을 이어주다
한국전쟁 중 박 선생의 대외 활동은 더욱 눈부셨다. 한국 아동복지위원회, 세계대학봉사회 한국위원회, 외국 민간원조기관 한국위원회, 한국기독교 세계봉사회, 부녀복지 사업위원회 등에서 박 선생은 한국말과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유엔과 국제관계에 밝아 모든 연락관계, 통신, 송금 등을 담당해 그야말로 회원기관과 한국사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전후에 난민구호사업에 주력하던 성격의 YWCA프로그램도 Y틴, 대학생, 청년, 주부들의 클럽을 통해서 지·덕·체를 두루 겸비한 균형있는 인격을 기르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역점을 두게 된다. 박 선생의 지도력은 YWCA가 근로여성과 농촌여성의 요구는 물론 도시 저소득층 여성을 위한 인권운동, 야간학교를 통한 여성교육제공, 중산층여성의 취미활동과 자질향상 교육 등 다양한 형태로 뻗어나갔다. 70년대에는 가족법 개정운동과 타일 도배 페인트 훈련을 통한 새로운 여성 직종도 개발했다. 파출부 교육교재를 개발, 돌봄노동의 전문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YWCA는 건물이 아닙니다. YWCA는 사람입니다. YWCA는 사업주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가 중요합니다.”
2013년 1월 30일은 2001년 향년 99세로 소천하신 고 박에스더 선생의 추모 12주기다. 한평생을 YWCA를 위해 헌신하셨던 그분의 향기는 그분으로 인해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 여러 한국의 여성지도자들과 선생이 머물렀던 명동의 YWCA 회관 내 박에스더기념관에 남아 있다.
◇고 박에스더 선생 약력
1926 하와이대 졸업
1928 미국YWCA연합회 간사양성과정 수료
1936 캘리포니아주립대 대학원 수료
1941 클리블랜드 웨스턴리저브대 대학원 졸업(MA)
이주영(한국YWCA연합회 부장)